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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4. 12~ 18 철암그리기 125차
오후 다섯 시 태백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하였다. 비가 내릴 듯 하늘이 무거웠다. 철암은 비교적 맑다고 한다. 허강일선생은 정선에 머물고 있다고 연락이 왔다. 삼방동 작업실 열쇠는 비밀장소에 넣어 두었다고 하였다. 통리-철암행 버스에 올라 카드를 찍었다. 사용할 수 없는 카드라고 그런다. 태백시에서는 특정한 카드만 결제가 가능하다고 하였다. 천 원짜리 지폐 하나와 오백 원짜리 동전 하나를 넣었다. 버스기사가 얼마짜리 동전을 넣었냐고 물어 본다. 오백 원짜리라고 하니 백 원짜리 동전 네 개를 요란한 소리를 섞어서 거슬러 주었다. 거리의 표정은 하늘보다 우울하였다. 부슬비가 조금씩 내렸다. 황지 연못은 새롭게 단장을 하였다. 송이재를 넘으니 하늘이 한결 가벼워졌다. 폐쇄된 통리역에 철도박물관이 들어선다는 소식이 있었는데 아직 계획 중인 모양이다. 역 앞의 상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매 5일 통리장이 서는 날이 아니면 마을 전체가 유령도시처럼 보인다.
파랑새다방 건물은 반투명의 분진차단 천막이 설치되어 있다. 독일의원은 이미 철거되었다. 남동쪽에서는 도로확장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신설교 구간까지의 까치발이 모두 제거되었다. 옹벽을 설치하기 위해 하천바닥에 물막이 공사를 하고 있는 중이다. 철암시장과 붙어 있는 철암로의 상가들 일부도 철거되고 있다. 보존구간을 확장하는 문제는 철거가 좀 더 진행돼봐야 알듯하다. 철암로의 가장 큰 건물인 독일의원의 철거는 아깝고 아쉽고 화가 날 일이다. 그 만한 건물을 언제나 또 지을 수 있을까. 퍼런 철거딱지가 붙은 은성다방은 돈이 될 만한 창틀은 모두 뜯겨 없어졌다. 현실이 박리된 네모난 구멍은 선탄장의 풍경들로 채워졌다. 길 건너 탄광문화역사촌은 과거의 모습을 잃지 않은 대신 괴괴함을 얻었다. 아무래도 보존 복원은 삶의 공간에서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철암은 광산촌이 아니다. 폐광촌이라면 그게 맞는 말이겠다. 광산촌으로서의 지역 정체성은 역사의 한 구석으로 밀어 놓았어야 한다. 지난날의 역사와 문화를 삶의 현장에 두어서는 곤란하다. 보존이든 개발이든 둘 다 나쁜 것은 아니지만, 개발이 전제되지 않은 철거와 삶이 결여된 보존 복원사업들이 좋은 선택인지 의심은 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과거 광산촌 이미지를 현실에 투영하는 것이 옳은 선택인지 또 곰곰이 생각하게 한다. 해가 떨어지기 시작하자 철암로에는 머물만한 곳이 없어졌다. 삼방동 작업실의 방 하나를 쓰기로 했지만, 올라가면 바로 쓸 수 있는 조건은 아니다. 기온이 부쩍 떨어지고 있다. 옛날의 삼방교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통 기억해낼 수가 없다. 지금처럼 경사진 다리가 아니었던 것 같다. 복지회관 앞에 있던 철암의원도 어떻게 자리 잡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망각은 하천이 엄청나게 넓어졌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있었다.
좀 늦은 아침 철암모텔을 나와 작업실로 올라갔다. 동현씨, 찬우씨, 순철씨가 작업실테라스로 속속 모였다. 한 겨울을 개가 지내기도 했었고, 길고양이들이 무단으로 점거하여 새끼를 낳아 기르기도 하였던 방은 짐승의 털과 분뇨의 냄새로 찌들어 있었다. 허선생은 쓸 만한 물건들을 다른 방으로 옮겼다. 2개의 소파를 옆집 폐가에 임시로 내놓았다. 방의 짐들을 모두 치우고 철암마트에 들러 손걸레와 탈취제, 슬리퍼 등을 사왔다. 찬우씨는 사무실에서 대걸레를 가져왔다. 테라스의 쓰레기들을 마대자루에 담아서 내놓은 소파 옆에 쌓아두었다. 작업실을 오래 사용하지 않았는지 어느 곳이든 부연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다. 몇 번이고 걸레를 빨아가며 바닥을 훔쳤다. 동현씨는 지난 해 골뱅이피씨방에서 사용했던 간이침대와 전기매트, 이불, 작업테이블들을 가져다주었다. 하루의 낮이 후딱 지나가 버렸다. 캐리어의 짐을 풀고 옛날 철암기록 노트들을 워드로 작업하기 위해 테이블에 늘어놓았다. 허선생은 옆방에서 마을재생프로젝트 기금신청을 위한 발표 자료를 만들고 있었다. 노트북을 들고 허선생 테이블 맞은편에 앉았다. 마을재생프로젝트가 어떤 프로그램인지 물었다. 설명으로는 충분히 이해하였지만 구체적으로 사업을 진행시키는 문제는 훨씬 복잡하다. 주민들의 이해를 구했는지, 사업이 확정되고 만일 주민들이 반대하면 어떻게 할 것인지, 공가를 활용하는 문제가 쉽게 해결될 수 없음은 자신도 잘 알고 있을 텐데, 일단 기금부터 받고 보자는 것인지, 납득할 수 없는 사람이다. 아니면 뭔가 숨기고 있는 것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골목에서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아저씨와 아주머니인데, 아주머니는 내가 알고 있는 분이다. 창에는 희끄므리하게 이른 아침의 빛이 번지고 있다. 귀를 기울일 것도 없이 괄괄한 목소리는 이중의 창을 뚫고 들어왔다. 일상적인 대화가 아님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어제 밤에 소파와 마대자루들을 하치장으로 옮겼어야 했는데, 그대로 방치한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역정을 내시는 아저씨의 목소리에 주눅이 들어서 밖에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불 속에서 밖이 조용해지기만을 기다렸다. 다시 잠이 들었다가 깼을 때는 오전 10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뒷집 아주머니 댁에서 수돗물을 받아다 세면을 하고 내려가려는데 목소리의 주인공이신 아저씨가 작업실로 찾아오셨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아저씨의 말을 처음 듣는 것인 양 경청하였다. 폐가인 옆집은 마을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쓰레기들을 폐기하여 아주 볼썽사나운 곳이었다. 동사무소에 몇 번이고 요청하여 폐기물들을 어렵게 처리할 수 있었다. 그 곳에 또 누군가가 폐기물들을 투기한 꼴이 되었으니 역정이 날 만한 상황이다. 동현씨를 만나서 할매곱창집으로 식사하러 가는 길에 허선생을 만났다. 오늘 아침의 일을 설명하고, 혼자서 옮길 수 있는 마대자루들을 지정된 하치장에 내놓고 소파는 식사 후 같이 옮기자고 하였다. 그렇게 하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부터 허선생에 대한 동네의 평판이 좋지 않아서 염려스러웠었다. 허선생은 마을을 대상으로 자기 사업을 하려는 사람이다. 주민들로부터 신뢰를 받아야 할 사람이다. 식사를 하고 작업실로 돌아왔을 때 찬우씨도 와 있었다. 쓰레기 자루들은 그대로 있었다. 작은 동네에서 구설에 오를 만한 일은 사전에 만들지 않는 게 좋지 않겠냐고 가볍게 말을 던졌다. 허선생은 구설이라는 말에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였다.
“구설수라뇨?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다는 겁니까?”
느닷없이 발끈하였다. 남의 쓴 소리를 견디지 못하는 모습을 몇 번 봐왔지만, 지금의 반응은 너무 의외였다. 마치 내가 듣기 싫은 소리를 할 것이라는 예상을 하고 있었다는 반응이다.
“난 단지 쓰레기를 치우자고 하는 말이고, 허선생도 아까 그렇게 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전 지금 무지 바쁩니다. 쓰레기들을 치울 시간이 없습니다.”
“그럼 그렇게 얘기할 것이지 아깐 왜 치우겠다고 그랬나?”
“다음에라도 치우겠다는 말이지 당장 치우겠다는 말은 아닙니다. 한선생님께서 치우자고 했다고 제가 그 것을 당장 꼭 치워야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내 말은 당장 치우자는 것이었지 나중에 치워도 상관없는 일을 얘기한 것은 아니잖은가.
어쨌든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도 아니니 지금 치우는 게 어떻겠나?”
“전 지금 바쁩니다. 그리고 사실 그 짐들은 한선생님께서 그 방을 쓰시려고 내놓은 것이지 제가 그런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 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가?”
......,
“그럼 어찌되었든 내가 알아서 내다 버릴 테니 허선생은 바쁜 일이나 보시게.”
“제 짐들이니까 그냥 두세요. 제가 버리겠습니다.”
“나는 당장 치워야겠는데, 허선생은 그럴 시간이 없어서 못하겠다고 그러고 나 보고는 치우지 말라 하고 무슨 말이 그런가?”
“아무튼 그냥 두십시오. 제 물건이니까 제가 버리겠습니다.”
“알았으니 일이나 보시게.”
허선생은 주섬주섬 짐을 챙겨 자리를 떠났다. 나 또한 이 작업실 공간에 대한 미련이 싹 달아났다. 더 이상 깊은 인연이 되는 것은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겠다. 그의 불성실함은 나의 인내심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그의 태도에 대한 불쾌함으로 격앙된 마음을 숨기기 위해 미소를 지었다. 허선생과의 인연은 이것으로 끝내는 것이 좋겠다. 이런 일은 단호하고 깨끗해야 한다. 찬우씨의 도움으로 짐을 정리하고, 동현씨는 침대와 테이블들을 다시 집으로 옮겼다.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야 하는 부담이 시간이 지날수록 커져갔다. 사실 다른 대안은 찾기 어려웠다. 찬우씨의 사무실에 앉아서 하염없이 고민을 거듭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결정에 대해서는 일말의 여지없이 옳은 판단이다.
황지 동아장모텔 별관에서 하루를 묵었다. 지난 밤 술자리를 함께 했던 찬우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삼방동 작업실에서의 일을 지켜 본 터라 앞으로 머물 곳을 정하였는지 물어보았다. 태백산민박촌에 머물면 좋겠다고 하였다. 당골에 가본지도 오래 됐고, 잠시 철암을 떠나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당골 광장 주차장은 비수기의 평일이라 그런지 텅 비어 있었다. 찬우씨는 여기 온 김에 조영남미술관을 둘러보자고 하였다. 당골의 구 농협건물을 조영남 개인 미술관으로 만든다는 말은 들었지만, 관심 밖의 일이라 흘려들었었다. 궁금하기도 해서 주차장 안쪽 매표소로 갔다. 표를 끊으려다 혹시나 해서 직원에게 물어보니 그게 뭐냐고 한다. 그런 시설은 없다고 하였다. 공연히 표 값만 날릴 뻔 했다. 당골 식당촌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민박촌에 방을 잡았다. 18일 오전에 데리러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찬우씨는 철암으로 넘어갔다. 민박촌에서 이틀 밤을 보냈다. 펜글씨를 바탕체 활자로 바꾸는데 꼬박 이틀 밤낮을 보냈다. 전공학생들 마저 애먹였던 원형갑선생님의 악필을 무리 없이 읽어 냈었는데, 내 노트의 손 글씨는 판독이 불가능한 암호처럼 난해하였다. 내가 뭐라고 지껄이고 있는 거야 도대체......,
17일 정오 쯤 동현씨 연락을 받으니 철암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동현씨가 민박촌으로 마중 나온다고 하였다. 망설임 없이 짐을 꾸렸다. 오는 길에 메밀뜰 순두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철암에 와서도 딱히 머물 곳이 없어 찬우씨의 사무실에서 종일 시간을 보냈다. 사실 삼방동의 공가들은 많은 것 같으면서도 실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전기, 수도도 문제고 지붕과 벽들이 온전하지 못하다. 통장님이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한 집은 순철씨 집 바로 아래에 있는데, 다들 고개를 저었다. 철암연립상가들은 대부분 짐들이 채워져 있고, 또 월세의 부담도 만만치 않아서 고려하지 않았다. 단기 임대라면 충분히 임차하여 쓸 수는 있지만, 주인 입장에서 달가운 조건은 아니다. 찬우씨와 저녁을 먹고 몇 번을 망설이다가 황지로 다시 나왔다. 동아장 가는 길에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내일 일정을 마치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떠하냐고 자문하였다.
탄광문화역사촌 진주성에서 찬우씨를 만났다. 찬우씨 차에 캐리어를 실어놓았다. 이경희, 이종미, 박서정님이 세미나 준비 차 다른 분들보다 먼저 철암에 도착하였다. 서용선, 이인범, 김찬동, 문혜정선생님은 정다운가든에서 점심식사 중이라고 하셨다. 며칠 전부터 이 번 세미나를 두고 분분한 말들이 오갔다. 주최가 누구고, 무얼 얘기하는 자리인지 분명하게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역민들은 이 번 세미나의 주최 측 의도와는 다른 기대를 갖고 있을 지도 모른다. 세미나의 주제는 ‘탄광문화역사촌의 진행과 전망’......,이다. 주제만 보면 역사촌에 국한된 내용으로 보일 수 있다. 그게 사실일 수도 있다. 철암과 역사촌은 서로 다른 기류에 속해있다. 역사촌의 전망은 얼마든지 공론화할 수 있다. 하지만 철암의 ‘전망’은 불투명하고 부정적인 것들에 대한 思念들로 가득하다. 결코 실현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지레 자족하고 기망하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다. 철암은 탄광촌의 이미지가 삶의 연속선 위에 부자연스럽게 놓여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이미지는 삶의 생태계를 교란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경희선생님은 내가 철암에서 할아텍과 직접적으로 관계되었던-작업실을 운영하고 갤러리를 설치하였던-부분들에 대해서 얘기해 주기를 요청했다. 달갑게 발표할만한 내용은 아니지만, 지나간 기억들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의미가 있었다. 그 과정에서 교류하게 된 지역 사람들과의 관계는 사적일 뿐만 아니라 극히 일부분이어서 자칫 지역과의 관계를 일반화할 우려가 있다. 거론하지 않는 게 좋겠다. 사실 철암그리기와 지역사회를 어떤 관점에서 바라볼 것인지는 고민스러운 부분이다. 철암은 과거 국가주도의 에너지 정책으로 희생된 지역이라는 인식이 있는 곳이다. 수많은 광부들의 죽음을 담보로 국가에너지를 생산해왔고, 목표량을 달성하기 위해 사람 죽어나가는 건 일도 아니라는 섬뜩한 말들이 상식이었던 곳이다. 지금의 철암은 광산과 관련된 구성원들이 급속도로 이탈하면서 무형의 유산이었던 지식들, 지역 구성원에게 내재된 암묵적 지식들이 흐트러져 있지만, 과거 광산촌의 잔상이 여전한 곳이다. 이경희선생님은 내가 불필요한 고민에 빠지는 위험을 사전에 제거해 주신 셈이다.
태백미협회장인 김기동님의 발언 중에 소동이 일어났다. 발언권을 구하지 않고 주민 중 한 분이 세미나의 진행을 막았다. 고성의 힐책이 있었다. 순간 여러 생각들이 머리를 스쳤다. 고의적인 행동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닐 수도 있다. 몇몇 초대받지 못한 주민자치위원회 분들이 동사무소를 통하여 소식을 듣고 참석하고 계셨다. 그 쪽 분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이런 사태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소동은 오래 지속되었다. 몇몇 주민 분이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뒤따라 나갔다. 배일환님도 이어 밖으로 나오셨다. 역사촌 건너편 주차장에 한 동안 서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민 분은 태백시 행정에 대하여 일갈하였다. ‘철암의 대다수 주민들은 시 홈페이지에 게시되는 공지사항들에 대하여 접근성이 떨어진다. 인터넷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분이 많아서 아날로그 방식의 접근도 있었어야 했다. 철암주민들은 탄광문화역사촌이 어떤 과정으로 진행되어 왔고, 구체적인 사업내용이 무엇이며, 운영주체를 선정하기 위한 공개입찰에 대한 정보도 알 수 없었다. 이런 시설들을 만들면서 철암주민들에게 제대로 홍보를 하지 않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외지인이 운영하고 상가도 외지인이 차지하면, 이 시설이 철암주민을 위한 것인지 생각해 본적이 있냐.’ 고 성토하였다. 사실 이 시설은 주민을 위한 것일 수도 있고,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 배일환님은 주민 분을 이해시키기 위해 애를 쓰셨다. 이야기가 길어지면서 주민 분도 대체로 수긍하시게 되었지만, 시의 행정에 대한 아쉬움은 거두지 않았다. 배일환님이 진주성에서 같이 차를 마시자고 하였다. 누군가를 소개해 주시려는 것 같았다. 진주성에는 초면인 두 분이 자리를 하고 계셨다. 한 분은 주민자치위원장이신 김홍수님이었고 다른 분은 김종만님이었다. 김종만님은 구면이었지만 정확히 어디에서 만났었는지 기억은 없었다. 김종만님은 자치위원회에서도 할아텍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왜 자기들과는 접촉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는지, 이찬우씨나 김동현씨 하고만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대해 다소 섭섭함을 표현하였다. 향후 철암에서 활동할 때 도움이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돕겠다는 취지의 말을 하였다. 사실 철암에 관변단체가 너무 많아서 이방인으로서는 구분하기도 어렵거니와 만남 자체를 거부하던 분들도 있어서 지역과의 관계를 만드는 일이 조심스럽다고 하였다. 주민자치위원회의 예상치 못한 호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철암에 와서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릴 때, 내게 먼저 손을 내밀어 준 몇몇 분을 제외하면, 나는 늘 경계의 대상이 되었던 것 같다. 내가 그들에게 먼저 다가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들의 의심과 배척을 받아들이는 것은 괴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도움을 받고자 철암을 여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 또한 나의 도움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서로 직면한 현실이 다르고, 각각 그 현실을 살아내는 것뿐이지 않겠는가. 김홍수님은 서로 연락처를 교환하고 용무가 있어서 먼저 자리를 떠났다. 김종만님은 동사무소 2층에 주민자치위원회 사무실이 있으니 도움이 필요하면 방문해 달라고 하였다. 그 진의의 여부를 떠나 무미한 표정, 태도는 말문을 닫게 했다. 불신과 배타, 강퍅함이 매우 온건하고 호의적일 때 읽히는 그런 표정이었다.
세미나에서 하고 싶었던 말은 사실 도시재생에 관한 것들이었다. 철암은 에너지 시장에서 경쟁력을 잃었으므로 다른 시장을 창출해야 한다. 시장은 한정된 크기를 갖고 있지만, 끊임없이 움직인다. 항상 새로운 시장이 창출되는 듯한 착시를 일으키는 이유이다. 철암이 선택하고 나아갈 방향이 바로 시장을 움직이게 하는 일이다. 과거 광산촌의 유산들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해결책도 그 안에 있다. 김찬동선생님은 철암에 국내 최대의 중고 책 또는 LP판 집산매장과 관련 사업들을 예시하셨다. 같은 맥락으로 서울의 젊은 공예인들과 황지, 장성의 젊은 미술전공자들을 철암으로 유입시켜서 국내 최대의 생활 공예의 거점이자, 생산 공장, 소비시장으로 전개시키는 사업을 추진할 수도 있겠다. 논점은 국내 최대라는 수식어를 붙일만한 규모를 확보하는 일이다. 자본주의시장경제에서 규모는 여러모로 유리한 부분이 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해야 하는 일이다. 세미나에서 탄광문화역사촌의 전망이 아니라 ‘철암의 전망’이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일방적 발제와 질의응답식의 세미나 이전에 지역민들의 발언들을 먼저 들어보는 자리가 있었으면 어땠을까 거듭 생각하게 한다.
2014. 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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