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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7일의 선탄장 주변 그리기
오후 2시, 몇 시간을 기차로 달려와 바로 역 앞 식당에서 곧바로 점심을 마친 뒤 철암역 맞은편 산비탈, 지난번 그림 그리던 자리에 자연스레 자리 잡았다.
힘없이 넘어가는 산 위, 저 멀리서 비추이는 남루한 초겨울의 햇빛 때문에 맞은편 산줄기에 가리워 진 거대한 석탄 더미는 철암역 위 편의 선탄장(?)부분 외에는 희뿌연 장막 속에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가려야 겨우 확인 될 수 있었다.
약간 바래진 에메랄드 녹색의 산줄기를 덮고있는 비닐천막들은 산업 근대화의 비밀스런 상처들을 치유하지 않은 채, 슬쩍 덮어놓은 임시붕대처럼 보인다.
뾰족한 함석주름의 삼각형 원뿔형태는 석탄집적을 위해 갑자기 건설된 회색 빛 사각 박스 형태의 시멘트 건물들과는 사뭇 달라서 완벽한 형태로 내 눈을 끌고있다. 흰 종이의 중심부에 조심스레 크레용 형태의 9B흑연소묘재료로 빗살무늬의 삼각뿔을 그려 나간다. 아주 조심스럽게 몇 번의 선을 그으면서 마음속에 슬며시 후회 스런 감정이 퍼져 나간다. 마음에 썩 들지 않는 재료를, 시간에 쫒겨 전날 저녁 미리 준비하지 못한, 내 자신의 게으름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지난번 철암을 다녀온 후 아크릴 물감을 물과 섞어 병 속에 담가 갈까 하고 생각만 하다가 한 달이 벌써 지나고, 출발하는 전날에는 혹시 가방을 적실까 걱정되어 망설이다가 되는 대로 챙겨 출발한 것이다.
종이 또한 재질감이 거친 수채용 종이를 아침 일찍 작업실에 들려 되는 데로 둘둘 말아온 것이다.
결국, 선을 긋는 순간 우툴두툴한 인조 재질감이 부드러운 흑연재료와 만나면서 제어할 수 없는, 마치 맨 흙바닥을 손바닥으로 쓸어 보는 듯한, 전혀 바라지 않던 종이 표면의 점, 점들이 석필로 돌 바닥 위에 선을 긋는 느낌이 여과 없이 나의 눈 속으로 휩쓸려 오는 것과 같았다.
그 느낌 때문에, 그 느낌을 극복하려고 내 팔은 힘이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부드럽고 둔하게 그러나 예측하지 못한, 어쩔 수없이 반복하여 찍힌 기계의 압력에 의한 종이 표면의 요철을 극복하려고, 뚜렷하고 짙은 윤곽선을 강조하는 쪽으로 그림의 방향이 바뀌어 가고 있었다.
넓게, 화면이 갖고있는 막연한 추상적 공간감을 건물, 석탄더미, 장비들, 열차의 화물칸차량들의 윤곽 구분을 위한 형태를 필요이상으로 강조함으로써 남게되는, 크고 작은 흑백의 여백들을 조절함으로써 화면전체의 구성을 조절하고, 건너편 산자락이 품고있는 형상들을 가슴속 이리 저리 굴려 보는 것이다.
그림의 오른 쪽 밑, 역 주변과 내게서 가까운 동네의 건물들의 윤곽선을 뚜렷이 하려고, 온몸을 긴장시키며 선을 그어 나가면서, 특히 수평으로 그어 나갈 때는 평행선을 유지하기 위해, 엉치와 가슴통의 뼈대에 힘을 골고루 유지하여, 팔의 힘을 여유롭게 하고 호흡의 자유로운 조절과 안정된 힘을 스스로 통제함으로써 선의 간격을 틀리지 않으면서, 또한 힘있는 선을 유지하려고, 온 몸의 신경을 곧 세우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림은 신체의 정치학이 아니던가? 아니면 통치학이던가?
뭉툭한 크레용형태의 흑연덩어리가 손아귀 속에서 부러지지 않도록 손아귀전체의 관절의 힘들을 조절하면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 때, 처음 부닥뜨렸던 재료 때문에 생긴 불안감이 해소되기 시작하였다.
3시반쯤 단계 지워 놓은 석탄더미들을 덮어놓은 비닐 막과 철암역 레일위에 석탄을 싣기 위해 일렬로 연결되어 서있는 석탄용 화물차량들 위 부분의 석탄운반차량용 도로들의 풍경은 산등성이 너머의 뿌연 황갈색 혹은 보라 빛과 교차하며,은빛 섬세한 잠자리 날개 속의 가는 무늬들을 드려다 보는 것 같다. 이것들이 철암의 옆구리이다.
주요한 석탄산업을 위한 건축조형물들은 그 알량한 경제성 때문에, 서둘러 찍어낸 거푸집의 자국들이 내 동공에 간질간질한 자극을 가해 오지만, 억지로 외면하면서 그림의 왼쪽 아래 부분으로 손을 옮겨 나간다. 익숙한 화가처럼, 당장 대도시로 돌아가야 할 인정머리 없는 사람처럼...
사실, 그 거푸집 자국들은 철암지역의 특히 석탄산업에 종사하였던 많은 이들을 오랜 세월 집단적으로, 반복하여, 무의식적으로, 눈을 통하여 심장으로 도끼자국처럼 상처를 주었음에 틀림없다. 괘씸한 행위들, 치유 받지 못할 상처들, 철암그리는 이유가 이만하면 충분할까?
4시가 훌쩍 넘어가고 있다.
산비탈 높은 곳 엉성하게 지어놓은 흰색에 가깝게 바래 버린 낮은 지붕들로 잇대어진 산동네, 군데군데 잔류하고 있는 가파르고 좁은 산길 위에서 조그만 자연석들을 얼기설기 쌓아놓은 축대위에서 내 몸이 속속들이 얼어가고 있었다. 갑자기 콧물이 흐르는 것 같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왼팔로 뒤뚱거리는 조그만 돌덩어리에 의지하면서 몸을 일으켜 세운다.혹시 감기라도 걸리면 귀찮은데...
일어나 보니 짙은 흙색과 대비되는 하얀 종이 위 반즘 그려진 형태들이 삶의 괴로움을 무시한 채, 유리된 채 자신의 진실을 요구한다. 뻔뻔스런 그림 같으니.
햇빛이 산등성이에 걸렸는지 2시경 보다 더욱 투명하게 산마루 아래 철암의 옆구리가 얼음속 돌덩이처럼 불투명한 듯 투명하게 드러난다. 깨끗하고 아름다운 산허리가 아닌 건강하고 힘찬 모습이 아닌 백두대간의 태백산 자락 속에서 억지로 끄집어낸 탄더미들이 산자락 옆구리에 억지로 잘라낸 통나무들로 꼭꼭 눌러진 채 비밀스럽게 몰래 빛 바랜 20세기 화학혁명의 결과인 비닐장막으로 덮여있다.
초겨울의 산그늘 속에서 그것은 풍경이 아니고 인공의 대지예술이다. 옆구리로 흘러나온 산악의 창자들, 우리들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성공시킨 20세기 에너지. 오랜 세월 저 깊은 땅속에서 천천히 뿜어내야 할 열 덩어리를 너무 빨리 끌어낸 것은 아닐까? 다시 수건을 큰 돌멩이 위에 포개어 얹어 놓고 호흡을 가다듬어 추위를 이겨내려고 조심스레 앉아 본다. 은근한 11월 중순의 강원도 산 속의 추위를 물리치면서 ,시간에 쫒기고 있음을 뻔히 알면서 종이를 메꾸어 보려고, 철암 풍경의 옆구리를 치료해 보려고, 정말로, 석탄더미속의 원래의 자연풍경을 찾아보려고, 그늘 속을 응시하면서 그림의 위 부분을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그려 보다가 추위를 참지 못해 일어나 보니 겨우 20여분이 지났다. 점점 앉아서 그릴 수 있는 시간이 짧아짐을 느낀다. 마라톤 선수가 시간에 쫒기듯이 몇 번 뛰어 보다가 다시 마음을 다잡아 축대위에 걸터앉아 점점 그림을 메꾸어 보려는 욕심에 비닐덮개들의 모습들을 마구 무시하면서 그려나간다. 상처따위는 이제 그림의 주제가 아니다.
오른 쪽 어깨주위가 경직되는 것을 느끼면서 꾹 참고있던 추위에 다시 일어서니 4시 30분경? 역 5분 쯤 제자리 뛰기를 하다가 마지막이다 하는 되뇌임의 기분으로 억지로 땅위로 몸을 끌어 내린다.
마지막 인간이 가야할 곳, 자연에 대한 풍경관찰의 전통을 홀라당 벗어 던지고 양복처럼 갈아입은 모더니즘, 포스트 모더니즘예술을 고발하는 심정으로,
석탄더미 속에 감추어져 이제는 구멍 뚫린 산맥의 정기를 느껴보고자, 정심 어린 시선을 서울에서 멀리 떨어 진 태백시 철암동까지 비쳐주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관찰했던 햇빛에 의해 남루해져 가는, 녹색 비닐포장의 부드러운 피부에 마지막으로 꽂아본다.
그렇지만 서구의 마지막 주자이며 아프카니스탄을 요절내고 있는 U .S. A.에서도 예술에서의 자연풍경의 경험적 불가피성과 이해불가능의 절묘함에 대하여 끝내 외면하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동양의 역사 어린 자연 풍경을 그리워 하기 까지 한다. 절대추상의 숭고함에 대하여 현대 미술사가 조나단 화인 버그는 그것이 자연에 대한 경험에서 온다고 하지 않았던가,
홍익대학의 한정희 교수가 번역해낸 [중국산수화의 세계]에서 송나라의 하규는 경치와 대상물 통해 원리에 이르고자 하였다는 데.....
석탄더미 너머에 철암 풍경이 있는가 없는가?
아직도 뼛속의 냉기가 빠지지 않는다.
01.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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