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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장복
  좋은 그림, 나쁜 그림
  http://blog.naver.com/ryubox

좋은 그림, 나쁜 그림











좋은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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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된 그림 ----- 선 생 ----- 못된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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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그림









1.

흔히 아는 대로 물체를 묘사하려 한다. 편하기 때문이다. 편한 건 습관이다. 습관은 반복된 기억이고 기억은 지각된 이미지다. 지각은 기억에 의존하고 기억은 관념을 만들고 관념적 선입견은 습관을 부른다. 누구나 습관화된 지각의 틀로 사물을 보려고 한다. 습관은 일상을 영위하는 강력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림세상은 비일상적 시공간이다.




눈앞에 사과를 그린다고 하자. 사과를 본 적이 없는 어린 아이거나, 사과가 나지 않는 지방에 사는 사람이거나, 외계인처럼 사과를 생전 처음 보는 게 아니라면, 기억 속에서 사과의 이미지를 끄집어내 눈앞에 지각된 사과 이미지를 보충해서 그린다. 사과의 생김새가 기억 속의 그것과 충분히 일치하지 않을 때 사과를 들여다보게 된다. 관찰자의 눈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대부분 그림에 눈이 맞추어져 있다. 이미 알고 있는 사과의 모양새를 그리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미 알고 있는 이미지가 사진 이미지일 수 있다. 19세기 중엽 카메라가 처음 출현한 이후로 세계는 정보화된 사진 이미지에 둘러싸이게 됐다. 지구 반대편에 가보지 않았어도 한 장의 사진으로 있었던 사건을 간접 경험할 수 있는 세상이다. 사진 이미지로 코끼리를 알고 있던 사람들의 눈앞에 실재하는 코끼리가 우스꽝스럽고 불완전해 보일 수 있다. 심지어 그들의 눈에는 코끼리가 아닐 수 있다. 사진 이미지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물의 원형으로 자리 잡았다.




"와! 사진처럼 똑 같다." 그림 앞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감탄이다. 그 물체가 아니라 그 물체를 찍은 사진 이미지에 얼마큼 가까운가를 두고 탄성을 지른다. 사진기의 눈을 기준으로 육안의 노력을 가상히 여기는 찬사다. 기계의 눈이 정직하다해도 육안을 대신할 수 없다. 사진은 사진을 찍는 한 순간의 육안으로 가능하다. 사진적인 그림은 사진적인 전략을 동반할 때 정당하다. 사진 이미지를 단지 모사하는 건 맹목적인 소비다. 요컨대 '기계의 눈'에 대한 어떤 전략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좋은 그림이 되기 어렵다.




정리하면 이렇다. 흔히, 이미 알고 있는 대로 편하게 그리려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습관화된 것이다. 습관적인 관념 속에 상투적인 이미지가 있고 사진 이미지가 그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사람들은 사진 이미지를 머릿속에 떠올려 놓고 모든 기법을 동원하여 자발적으로 얽매인다. 서양의 원근법적 시각체계와 광학의 발달에 힘입어 사진기가 출현하게 된 아이러니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기계적인 사진의 재생력에 인간이 힘을 겨루는 꼴이다.





2.

좋은 그림과 나쁜 그림은 뭐가 다를까? 좋은 그림은 자체로 목적이지만 나쁜 그림은 수단이다. 좋은 그림은 지금 여기 미적 존재의 당위성을 갖는다. 어떤 가치를 향한 실천적 사건으로서 예술작품은 존재한다. 가치의 지향점을 향해 그림의 기호가 작동할 때 예술작품이 된다. 좋은 그림은 동사적이다. 명사적으로 지시되는 '그' 그림이 아니라 이러저러한 가치작용을 일으키는 '그런' 그림이 좋은 그림이다. 깃발처럼 나부끼는 가치지향점은 많을수록 좋다. 다양성 때문이다. 다양함은 풍요의 전제조건이다.




반면에 수단적 가치에 집착할수록 나쁜 그림일 가능성이 높다. 좋은 그림은 스스로 목적이 되고 나쁜 그림은 목적을 위해 소모된다. 좋은 그림은 그림 안의 목적에, 나쁜 그림은 그림 밖의 수단에 가치를 둔다. 나쁜 그림의 예는 많다. 상대평가의 입시관문을 통과하기 위한 그림, 공모전에 수상하기 위한 그림, 과제전시에 내놓기 위한 그림, 학위를 수여받기 위한 그림.. 화가로 등단하기 위한 그림도 따로 있어야만 할 것 같다. 얼핏 기법이 먼저 시선을 끄는 경우에 어떤 종류의 감동이나 설득력이 곧잘 부족하다. 절망이 기교를 낳고 기교가 또 절망을 부른다 하지 않던가. 더 나쁘거나 덜 나쁜 그림이 있을 뿐이다.




만약 '꽃'하면 떠오르는 화가가 있다고 하자. 그 꽃그림이 그 화가가 가치 지향점을 향해 가는 여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이미지라면 괜찮다. 그러나 특정 스타일의 꽃그림이 고정적으로 그 화가를 지시한다면 그 그림은 붕어빵처럼 찍어내는 물건과 다를 바 없다. 상화는 팔기를 작정하고 대중의 기호에 맞추지만 재화를 얻기 위한 수단적 가치를 숨기지 않는데 비해, 사이비 예술작품은 흔히 조잡한 가치지향점을 내세워 수단적 가치를 가린다. 시장의 가치는 길바닥의 시장이든 미술계의 고급시장이든 간에 그림 밖에서 고려되어야 할 이차적인 문제다.





3.

아무렇게나 그은 선이라 하더라도 어떤 기법으로 분류되고 기법은 또 어떤 조형의 원리를 따른다. 어떤 기법이고 어떤 조형원리인지 행위주체가 몰라도 상관없이 그렇다. 조형의 원리는 관점을 요청한다. 관점은 세계에 대한 인식주체의 태도로서 곧 세계관이다. 세계관은 세계와의 관계 설정이다. 선생은 앞쪽에 스승은 뒤쪽 진술에 더 관여한다. 선생의 경험은 제자의 기술적인 성공을 돕고, 스승의 지혜는 가치지향점을 향해 그림이 놓이도록 한다.




좋은 그림이거나 나쁜 그림이거나 잘된 그림이 있고 못된 그림이 있다. 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화가의 작품이라 하더라도 수작이 있고 태작이 있듯이. 붕어빵처럼 기계적인 과정을 거치는 상업화에도 불량품이 있게 마련이듯이. 성공적이려면 많은 시행착오와 높은 숙련도가 요구된다. 좋은 그림이거나 나쁜 그림이거나 마찬가지다. 그림이 잘되고 못되고는 가치지향점이 어디에 있는가와 상관없다. 좋은 그림이라 해도 솜씨가 일천하면 조악하고 나쁜 그림도 솜씨가 탁월하면 속물적인 취향에 잘 부합한다. 그림이 혼자 하는 거라지만 때로 선생의 도움이 필요하다. 선생은 그 길을 먼저 갔던 사람 혹은 작품 따위의 어떤 형태다. 선생은 되돌아와 후학이 겪어야 할 시행착오를 줄여줄 때 책무를 다하게 된다.




선생은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해 모른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스승은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스승은 자신이 세운 가치지향점과 다른 가치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얼마나 다른지를 구별하여 존재가치를 옹호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선생의 제자는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해야 한다. 그래야 무얼 모르는지 도움 받을 수 있다. 선생은 그런 제자에게 스승을 찾아주기도 한다. 반면에 스승의 제자는 모르겠다고 말하면 안 된다. '알겠습니다.' 라는 응답은 스승의 깨달음을 내 안에 채우겠다는 말이다. 또한 제자가 선생을 부정할 수 없는 만큼 선생 또한 제자를 가릴 수 없다. 그런가 하면 제자가 인정할 때 스승은 스승이 되고, 스승이 인정해야 제자는 제자가 된다. 일방적인 추종은 패거리 문화를 만들기 쉽다.




선생은 성공한 그림과 실패한 그림 사이를 오가며 동반자가 되려 하고 스승은 좋은 그림과 나쁜 그림을 구별하여 가치의 풍향계를 유지하려 애쓴다. 선생과 스승에게 으뜸가는 덕목은 다르다. 선생은 제자의 성장과정을 차분하게 지켜볼 수 있는 도량을 가져야 하는데 스승은 꼭 그렇지 않다. 스승은 뜻을 세우고 그 뜻을 함께 할 수 있는 제자들의 학문적 신념을 위해 가치지향점을 공고히 해야 한다. 선생은 모든 제자의 성장을 도아야 하고 스승은 더 나은 제자를 찾아 가르치려 한다.




좋은 선생이 좋은 스승이 되기 쉽지만 좋은 스승이라고 반드시 좋은 선생은 아니다. 못 그린 그림이라도 좋은 그림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나쁜 선생이더라도 좋은 스승일 수 있다. 아무리 좋은 선생의 덕목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가 올바른 가치지향점을 확보하지 못했다면 결코 스승의 역할을 할 수 없다. 반대로, 여러 모로 까칠해서 선생의 덕목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찾아보기 어렵다 하더라도 그가 제시하는 가치지향점이 또렷하여 세상을 밝혀준다면 훌륭한 스승의 역할을 다할 수 있다. 선생은 자라나는 싹에 물을 주고 스승은 지혜의 횃불을 밝혀 사람들을 모이게 한다.





4.

17년을 훌쩍 거슬러 커다란 캔버스를 앞에 놓고 몇날 며칠을 서성였던 모습이 강시처럼 다가왔다. 눈앞에 선하다. '그놈의 정체성'을 찾아 단칼에 베려고 했다. 내게 스승이 있는가? 5년여를 보낸 끝에 든 회의다. 단절된 가까운 역사의 굴레를 벗어던질 수 없다면, 스승과 제자의 파편화된 관계를 복원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작점에 있다.




오늘날 선생은 많은데 스승은 찾기 힘들다. 고도로 정보화된 사회에서 선생은 더 많아졌다. 그런데 스승의 모습은 잘 안 보인다. 지혜를 도외시하는 선생은 기술자에 불과하고 지적으로 게으른 스승은 선생의 덕목을 갖추지 못했다. 임금노동자에 불과한 선생과 나눌 수 있는 돈독한 정은 애초에 없고 권위적인 권력관계가 소멸하고 나면 그나마 허울뿐인 스승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좋은 그림이 뭔지, 스승의 혜안이 오늘의 그림 세상에 절실하다. 21세기의 문턱에서 동양의 가치를 곰곰이 밀어 올려보자. 사실 스승은 도처에 있다, 조각나 있을 뿐이다.




선생과 제자가 추억을 나누고 스승과 제자가 정신적 맥락을 확인한다. 지성의 추억을 더듬으며 서로의 존재가치를 확인할 때 사제지간은 생산적일 수 있다. 그 때, 스승은 자상하고 제자는 총명하다.





2009.4.7 25:18 륮.
[인쇄하기] 2009-07-06 01:2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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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형 좋은 글 감사합니다 출처 밝히고 ohjeng.com 으로 일부 퍼갈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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