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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0 - 1.21 철암그리기
1.20 토요일. 오후에 여주에 들러 욱인이를 태우고 철암을 향했다. 충청 내륙의 고속도로를 타고 제천으로 접어들어 영월을 지나 태백으로 갔다. 다가오는 풍경의 변하는 모습이 뚜렷하다. 너른 평야는 계곡을 향해 좁아들고 산은 병풍처럼 솟아오른다. 변화무쌍한 주름진 산하에서 원근법과 같은 단순한 시각체계는 그다지 쓸모가 없겠다. 지루한 수평선의 평평한 땅에서는 수직과 수평의 좌표공간을 만들고 사물을 위치지우는 일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하늘과 맞닿아 있는 지평선의 소실점으로 사라지는 우주의 질서 속에서 인간은 절대적인 유일신의 부름을 스스로 요청한다. 그러나 어지러울 지경으로 눈높이가 달라지는 빽빽한 자연에 둘러싸여 있다면 무엇보다 먼저 나의 위치를 확인하는 일이 훨씬 중요해진다. 숨죽여 누워있는 납작한 땅이 아니라 주름져 솟아난 산들이 울퉁불퉁 예측을 불허하며 생명을 발산하는 에너지에 둘러싸여 있다면 우선 자연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돌아보고 확인할 것을 요구받게 된다.
산굽이를 돌고 돌아 땅의 살 속을 파고들어 철암에 당도했을 즈음에 지진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흔들리는 차 속에 있어 체감할 수는 없었다. 거대한 땅의 갈라짐! 이 일대의 지하는 석탄을 캐내어 거미줄처럼 숭숭 구멍이 뚫린 채로 남아 스펀지 같지 않던가. 삶과 죽음의 경계가 머릿속에 그어진다. 우리는 조르쥬 바타이유를 이야기 했었다. 태양의 과잉 에너지는 죽음을 향한 인간의 ‘소모’를 원천적으로 정당화시킨다. 신성과 동물성, 금기와 위반을 욱인은 설명했다. 사라짐의 기운이 역력한 철암에서 데카당트한 미적 활기를 예감하는 것이 개별적인 취미만은 아니겠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바다를 옆에 끼고 살아가는 어촌 사람들과 인생의 막장이라 일컫는 탄광촌의 사람들은 태생적으로 닮은 구석이 있다.
욱인과 나는 골뱅이 피시방에 들러 김동현과 인사를 나누고 황지로 나와 늦은 저녁을 황태해장국으로 먹으며 막걸리를 두어 잔 마셨다. 수목원 숙소에서 철암그리기 일행들과 조우했다. 포도주를 마셨다. 화제가 옮아감에 따라 사진에 대한 이야기꺼리에 흥미가 일었으나 전날 밤을 샌 탓에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와 일찌감치 몸을 뉘었다.
1.21 일요일.
2007.1.21 08:30 수목원 모텔에서 함백산을 보다.,charcoal pencil on paper, 39x19.5cm
늦지 않은 아침에 눈을 떴다.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멀리 함백산이 마주해 보인다. 스케치북을 꺼내 이리저리 목탄연필을 부드럽게 긋거나 가볍게 두드렸다. 어제 머리맡에서 욱인에게 했던 말이 생각난다. ‘화면이 세숫물과 같이 보일 때 운필이 절대 자유로울 수 있다.' 아무리 휘저어도 물의 총량은 같기 때문이다. <08:30>
2007.1.21 10:29 계산동, charcoal pencil on paper, 39x19.5cm
수목원을 나와 초입의 가보자 해장국집에서 진한 황태해장국을 일행들과 먹고 장성으로 이동했다. 아름드리 소나무 숲에 아담한 절이 있고 그 아래 언덕배기에 계산동이라는 마을이 있다. 아침나절의 햇살에 먼데 산과 가까운 산의 농담이 분명하다. 하얀 중앙병원건물의 뒤쪽으로 하얀 수증기가 뭉게뭉게 피워 오르고 여러 가닥의 전신줄이 어지럽게 달려온다. 능선을 따라 꼬불꼬불한 길이 좁게 나있고 길을 따라 허술하게 지어진 집들이 마치 자라난 것처럼 이어져 있다. 차가운 대기가 코끝에 싸하다. 동네가 내려다보이는 길가에 서서 눈부신 겨울아침을 그리는 감회가 남다르다. 이렇게 이른 시간대의 그림이 내겐 드물다. 뚱뚱한 까마귀가 눈앞의 전신줄에 내려앉아 출렁거린다. <10:29>
2007.1.21 11:00 전차동, charcoal pencil on paper, 39x19.5cm
철암으로 이동했다. 월천동 산비탈이 철거 중이다. 육중한 4차선 도로는 남동다리의 흔적을 감쪽같이 사라지게 하였다. 길가로 면한 남동의 집들이 없어졌고 한동안 철암그리기 작업실로 쓰던 남동다방 앞이 훤해졌다. 기차길을 건너 전차동을 바라보았다. 스산한 겨울바람이 비스듬한 큰 나무의 잔가지를 소란스럽게 흔든다. 빽빽하게 들어선 집터 사이에 간신히 뿌리를 내리고 자랐을 터인데 지금은 빈집들 옆에서 광자의 머리칼처럼 왕성하게 가지를 뻗고 있다. 한사람이 빈집 앞에서 물끄러미 카메라 뷰파인더를 내려다보고 있다. <11:00> 전차동 위쪽에 광차가 다니던 길의 흔적이 아직도 선명하다. 협괴열차처럼 가파른 능선을 따라 광부들을 실어 나르던 시절에 똥골이라 불리는 이 골짜기가 사람들로 바글바글했겠다.
2007.1.21 11:36 남동, charcoal pencil on paper, 19.5x19.5cm
남동의 골목길이 내려다보인다. 골목길에 그림자의 어둠과 빛의 밝음이 아기자기하게 교차한다. 앙칼진 고함소리에 멀쩡한 남정네가 맨발로 뛰쳐나올 것만 같은 골목길은 서로에게 정겨운 앞마당이다. <11:36>
2007.1.21 11:56 철암천변, charcoal pencil on paper, 39x19.5cm
철암천변을 보았다. 곧 사라질 운명과 상관없이 묵묵한 표정이다. 욱인의 말대로 청계천의 모형과도 같은 철암천변의 자연손괴를 기념하는 인간의 제의적 행위가 또 다른 문화의 풍성함으로 받아들여지는 지혜를 생각해 본다. <11:56>
2007.1.21 15:25 부석사 무량수전 앞에서, charcoal pencil on paper, 39x19.5cm
네 대의 차에 분승한 일행은 영주방향으로 두 시간여를 달려 부석사를 찾았다. 좌우로 은행나무가 즐비한 길이 가파르게 대웅전까지 나 있다. 가장 위쪽에 자리한 오래된 목조의 무량수전을 보았다. 덤덤하고 담백하다. 밖에는 석불이 억억한 세월을 담은 채 하나, 둘, 셋 나란히 서있고 안에는 커다란 황금빛 본존불이 90도로 돌아앉아 있다. 부처의 얼굴에 수많은 표정이 포개져 있고, 부처의 표정에 수많은 얼굴이 겹쳐 있다. 무량수전을 등지고 아스라이 먼 산에서 발치에 이르기까지 천천히 더듬어 본다. 따뜻한 겨울의 오후 햇살이 강렬하다. 어디선가 종소리가 울리고 밥 짓는 연기가 골짜기마다 피워오를 것만 같다. <15:25> 부석사를 내려오면서 작은 알갱이의 달콤한 군밤을 까먹으며 말간 동동주 한 사발을 나누어 마셨다. 차 안에서 내내 먹었던, 욱인의 어머니가 만든 강정에서부터 시작된 고향의 맛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오래된 기억 속의 그 맛은 혀끝을 감돌아 내장 깊숙히 파고들었다.
2007.1.21 17:26 소수서원, charcoal pencil on paper, 39x19.5cm
10km를 이동해 풍기의 소수서원에 다다랐다. 정원에 휘휘 늘어진 소나무가 정원의 산책길을 감싸고 하늘을 향한 용비늘의 미끈한 소나무가 승천의 기백을 자랑한다. 남도의 유배문화와 사뭇 다른 스케일과 기품이 베어 있다. 이런 곳에서는 숨쉬기 공부가 최선이다. 하얗게 얼어붙은 호수를 건너가는데 저기 소나무가 처억 눈에 감긴다. 널찍한 징검다리 가운데 서서 스케치북을 폈다. 한그루의 소나무와 한무리의 소나무가 격조를 뽐내며 인간지사를 연극한다. <17:26>
2007.1.21 17:38 소수서원에서, charcoal pencil on paper, 39x19.5cm
숲 안에서 병풍처럼 펼쳐진 소나무 숲을 돌아보았다. 무작위와 작위의 경계를 무화시키며 넘나드는 소나무의 선율은 일획의 아름다움을 연신 내뿜는다. <17:38>
2007.1.21 17:44 소수서원, charcoal pencil on paper, 19.5x19.5cm
아무래도 아쉽다. 진입로의 소나무를 바라보며 신중하게 다시 선을 그어 본다. <17:44>
일행 가운데 몇몇은 울진의 반구대를 거쳐 부산 태종대, 진도의 운림산방을 답사하는 일정을 진행한다고 한다. 우리는 영주의 버스터미널에서 헤어졌다. 밤 9시가 넘어 여주에 도착했다. 깻잎과 백김치, 된장으로 담근 고추장아치와 동치미 그리고 툭툭 썰어 넣은 돼지고기볶음과 진한 된장국에 반주 한잔을 곁들여 하얗고 노오란 조밥을 한그룻 반이나 뚝딱 해치웠다. 이번 여행은 사실상 맛의 기행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일산까지 한달음에 왔더니 새벽 1시다. 2007.1.22 21:49 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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