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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패트론
1.
미술가는 미술을 수단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자를 가리키고, 화가는 그림을 업으로 삼아 삶을 영위하는 자를 가리킨다고 했을 때, 미술가는 태생적으로 사회적 강자를 지향하고 화가는 사회적 약자로 살아간다는 걸 의미하는가. 미술가는 ‘이것이 옳은(좋은) 미술이다.’라는 선언을 통해 존재를 확인하고 설득 여하에 따라 강자로 부상한다. 따라서 미적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권력은 필연적으로 수반된다. 반면에 화가는 그림을 그려 생업을 유지하는 자로서 작품의 사용가치에 의존적이다. 때문에 가치 지향적 태도와 거리가 먼 속물적인 이해관계에 놓이기 쉽다. 미술관의 문을 들어설 때와 화랑의 문턱을 넘을 때 무의식적인 기대치가 다른 것과 같다. 전자의 경우에 자기 집 거실에 걸어놓아 둘만한 소장품을 찾지 않고 후자의 경우에 교양에 도움 될만한 모종의 시대적, 윤리적 가치를 우선적으로 기대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예술작품이 놓일 기념비적 장소의 특수성을 고려해야 할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경우 장식적 사용가치에 따르기 마련이다. 이럴 경우 보고 즐길 수 있는 작품으로 내가 좋으면 그만이고 ‘가치 있는’ 의미가 더해지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고 생각하는 게 보통이다. 미술관에 들어갈 그림을 그릴 것인가, 화랑에 걸릴 그림을 그릴 것인가 결정하라고 어느 미술대학 교수가 말했을 때 상아탑을 쌓아야 할 강단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현실적인 구분이다.
잘 나가는 상업화가나 원로 미술대학교수처럼 안정된 제도권에 편입되어 성공한(?) 그들이 한결같은 말투로 늘어놓는 무용담을 한번쯤 들어보았을 거다. 위대한 ‘미래의 나’는 언제나 ‘현재의 나’를 초라하게 만들며 현실의 객관적인 사실관계를 덮어씌운다. 미래의 그 모습을 향해 현존의 삶을 스스로 기획하고 이끌어야 한다고 할 때 100% 순도를 자랑하는 미술가의 상은 자라나기 시작한다.
강자로서 미술가가 추구하는 진리는 권력을 배경으로 성립한다. 이러한 권력적 맥락에 편입되지 못하는 대다수 소시민적 삶을 영위하는 화가는 순진한 부적응자에 지나지 않는다. 위대한 미술가의 모습을 좇는 모든 예비화가는 덜 성숙된 불완전한 존재에 불과하다. 숙명처럼 미완의 존재성을 승인해야 하며 때로는 스스로 내면화해야 하는 어떤 가치로까지 연결된다. 막대에 매달린 한점 고기 덩어리를 머리에 이고 뛰는 강아지처럼, 일말의 가능성이 있지만 곰곰이 따져볼 때 그것이 ‘너’일 확률은 별로 없다. 숭고한 희생을 치르고 영웅적으로 짧은 생을 마감한 어느 예술가의 상은 기층민들에게 환상적 마취의 효과를 거두기에 딱 좋을 뿐이다. 반 고흐처럼 귀라도 한 개쯤은 잘라야 훌륭한 화가가 되는가.
‘하면 된다.’ 군사정권시절의 구호다. 피라밋의 정점을 향해 매진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가시적인 상을 끊임없이 제시해야 할 필요가 있고 장밋빛 미래는 그렇게 생산되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되는 것만 된다. 되니까, 하는 거다. 내가 가장 잘하는 것일 때 효율이 높고 생산성이 높다. 그에 따라 자연적으로 직업적, 장르적, 개성적 다양성이 실질적으로 보장될 수 있다.
가난한 미술학도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작품을 걱정하고, 작품 할 때 돈 벌 궁리를 해야 한다면 어느 쪽에도 전력을 다하지 못할 게 뻔하다. 마찬가지로, 주문받은 삽화를 그리면서 작가로서 궁핍한 생활고를 메워야 한다면 훌륭한 화가도, 삽화가도 되기 어렵다. 100% 순도 높은 화가의 절대상이 머리 꼭대기에 버티고 앉아 내려다보는 현실은 탁하기만 하기 때문이다. 소의 머리에 타고 앉아 호령하는, 한 줌의 쥐새끼를 떨쳐내지 못해 발생하는 혼란이다.
2.
누구나 한 사회에서 정상적으로 삶을 꾸려갈려면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 만큼 재화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진정한 주체’로서 화가의 모습은 가능하다. 만일 세속에 등을 돌려 관조의 태도를 유지하며 물아일체의 지경에서 신선의 삶을 꿈꾼다면, 결국 하나의 모습만 인정한다는 점에서, 객체에 투항하여 합일되는 약자의 주체로서 권력 지향적인 강자의 주체와 별반 다르지 않다. 객체에 ‘스며드는’ 약자의 주체나 객체에 ‘포개지는’ 강자의 주체는 쌍방향으로 작동하는 생물적 박동을 허용하지 않는다.
화가는 그림을 팔아서 살아야 한다. 상당한 시간을 그림을 그리는 데 쓰기 때문이다. 그 밖에 미술교육가가 아니라 하더라도 학생들을 비롯해 시민들을 가르친다던가 하는 일은 사회에 유익한 문화적 소통에 기여하며 경제적으로도 일익을 담당한다. 그렇지만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일은 그에 우선한다. 화가라는 직업적 정체성을 담보하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림 그리기’가 경제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데 주된 역할을 해야 하는 건 당연하다.
온전한 화가의 생활은 어떻게 조성되는가. 그림을 돈으로 바꾸는 화상이 있다. 일종의 중개상이다. 화상의 행위는 팔아서 이윤을 남기는 시장의 원리에 기초한다. 상품성이 있는 화가라면 비슷한 질의 작품을 될 수 있는 한 빠르게 안정적으로 생산해낼 수 있어야 한다. 상품적 수요의 요체는 근본적으로 화가의 인간적인 불안정성을 거부한다. 화상은 화가 혹은 작품의 미학적 가치를 수요자에게 이해시키고 설득하지만 동시에 화가에게 수요자의 취향을 요구한다. 직, 간접적인 표현에 따른 영향력의 차이가 다소 있을지 모르지만 화가의 입장에서 생활의 의존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수동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주문생산에 익숙해지면 질수록 화가의 영혼은 굳어갈 확률이 높다. 어느 날 다른 꽃을 찾아 날아가 버린 화상에게서 주문이 끊기고, 그의 상품적 가치가 수직으로 추락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진즉 알아챌 수 있었지만 나의 ‘필요’가 모른 체 했다. 원인은 최초의 거래를 가능케 한 작품의 ‘생기’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수요자의 주문은 자신의 모습을 작품에 투영시켜 작품의 가치를 완성하려는 행위인데 반해, 화가의 그림그리기는 자신의 육신과 정신을 그 속에 담는 행위이기 때문에 당연한 귀결이다. 한사람의 생활인으로서 화가는 그렇게 사라진다. 진정한 주체로서 화가의 작품 생산이 그렇게 중단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옳겠다.
오늘날 자본시장의 수요공급 방식에서 빗겨나 화가가 살 수 있는 사회적 공간은 없다. 좋은 화상이 있어서 그 공간이 생기는가. 나쁜 화상과 좋은 화상의 문제가 핵심이 아니다. 아무런 보호 장치 없이 자본의 시장에 노출된 화가가 무자비한 상품논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예컨대 특정한 작품이 훌륭하다는 이유만으로 작품이 거래되지 않는다. 좋은 그림이 상품적 유통의 충분조건은 아니다. 작품을 소유하는 행위가 적극적인 향유의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이긴 하지만 소유의 과정에 다양한 사회적 이해관계가 개입한다. 사회적 권력관계와 결코 무관할 수 없다.
작품이 화가의 손을 떠나는 1차 거래에서 보다 2차, 3차의 거래에서 예술작품의 높은 부가가치가 발생한다. 한 개인의 정상적인 생활의 영위를 담보로 이루어지는 거래에서 필요한 이윤이 얼마나 되겠는가. 20세기 후반을 풍미했던 미국화가 드쿠닝의 작품이 그의 생존에 수십 배가 넘는 시장가격을 형성하는 걸 보고 믿을 수없어 했다는 일화가 있다.
거대한 자본의 시장체계 속에서 화가가 상품으로 소비되지 않으려면 일종의 보호막으로서 일상의 문화공간이 필요하다. 소통의 수단으로서 사회적 공간을 주조할 필요가 있다. 상업주의 화랑체계에 부속된 화가는 물론, 본의와 무관하게 권력의 다른 한 쪽 끝에서 짝힘으로 작동하는,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한 화가에게 그러한 문화공간은 주어지지 않는다. 사회부적응자로서 화가의 일그러진 모습은 왜곡된 향유의 대중적 패턴과 만나 실체가 없는 신비적인 화가의 상을 더욱 고착시킬 뿐이다.
3.
죽음은 현존의 불가능성이고 잠과 같은 죽음충동은 회귀본능이다. 생물의 생명활동은 죽음을 대체하는 행위다. 인간의 노동은 생명활동의 연장선에 있다. 고인 물과 같이 썩지 않도록 부단히 순환할 수 있는 사회의 원동력으로서 인간의 노동은 정당화 된다. 그러한 노동은 더 큰 연못을 꿈꾸어야 하는 자본의 불필요한 잉여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인간의 예술 활동은 분화되어 쪼개지지 않는 완전노동에 가깝다. 인간은 예술과 예술 활동을 통해 풍요로운 삶을 도모한다. 누구나 정상적인 삶을 꾸릴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을 바탕으로 행복을 누릴 권리가 있다. 화가는 능력만큼 그림을 그리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안정된 삶에 필요한 재화를 얻을 때, 예술 활동으로서 건강한 노동력을 발휘할 수 있다.
시민사회는 한 사회를 구성하는 실질적인 단위다. 무수히 많은 물방울처럼 작고 큰 시민사회는 수중에서 산소를 실어 나른다. 생명이 일어나고 소멸되는 일차적인 집단이다. 시민사회의 일원으로서 온전한 화가의 존재가 가능하고 또한 요청된다. 그 연장선에서 미술작품은 한 화가의 소유물이기 이전에 그를 통과하여 현현된 사회적 산물이라 할 수 있다. 한 화가의 작품생산이 공동체의 이익에 기여한다면 그에 따른 향유의 사회적 권리가 발생하고 그 권리는 1/n의 책임으로 보장될 수 있다. 예컨대 한 사람의 화가를 추종하는 이익집단이 아니라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존재하는 자발적인 시민 패트론은 분명 대안이다.
구체적인 관객인 후원인과 작가가 만나 서로 무엇을 어떻게 나눌 수 있는가. 먼저, 작품의 감상이 작품의 소유를 전제로 할 때 분석 및 해석과 비평에 대한 참여가 이루어지고 그 과정에서 하나의 커뮤니티가 형성된다. 화가와 후원인이 만나는 일차적인 만남은 후원인과 후원인의 이차적인 만남의 생산적인 도발을 통해, 가능성으로서 더 큰 물질적 기반을 쌓게 되고 소통으로서의 문화공간은 실질적으로 가능해진다.
그리고, 화가와 후원인의 소통은 화가가 ‘무엇을 그릴 것인가’의 문제로 직결된다. 가령 나는 부드러운 노란색이 좋다든가, 구체적 형상을 지닌 사실적인 그림이 좋다든지, 또는 이야기가 있는 그림이 좋다고 말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이런 부분은 이렇게 묘사하거나 설명하면 좋겠다고 화가에게 말을 걸 수 있다. 전문적이지 않은 거친 표현이라 하더라도 진지한 해석과 분석을 가해보며 작품의 내용을 공유할 때 소통은 쌍방향으로 이루어진다. 최종적으로 작품의 내용을 기법과 형식을 통해 구현하는 건 작가의 몫이지만 방법론적 개연성은 열려있어야 한다.
특유의 방법론을 먼저 이해해야 하거나 아예 그것이 전부인 형식주의 미술의 경우처럼, 현대미술의 자기비판적인 작가주의의 태도에서 구경꾼이 아닌 구체적인 관람객이 끼어들 여지는 별로 없다. 모더니즘 계열의 대척점에서 다른 한 축을 형성한 민중미술의 경우에도 시대적 요청으로서 미학적 정당성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개별적인 삶으로 구성된 복잡한 전체를 왜곡했을 수 있다. 지금, 현재 나의 이익과 무관한 이데올로기적인 가치는 무의미할 수밖에 없고 유관하다 해도 여러 다양성을 전제로 유효하다. 작품의 내용에 직접 참여할 수 있을 때 비판적 독자는 형성되고 이를 토대로 자생적인 건강한 작가는 자라날 수 있다. 간단한 조작 등을 통해 관객참여를 유도하는 작품의 형식을 구사하는 경우라 하더라도 그러한 작품형식의 전략적 가담을 관람객에게 허용하는 건 아니다. 결론적으로 화가는 다각도로 이루어지는 후원인과의 소통을 통해 드러나는 가치의 지표를 따라 상응하는 그림을 그리면 된다. ‘구체적인 그들’이 나의 삶을 실질적으로 보장하고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수명은 연장되고 사회적 패러다임의 주기는 빨라지는 가운데 갈수록 정교해지는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서 화가란 직업으로 생존수준을 넘어서는 윤택한 삶의 질을 수혜받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대다수의 화가를 패배자로 몰아가기보다 상당수의 자생적인 건강한 화가를 한 사회가 보유할 때 사회적 생산성은 증가한다. 자발적인 시민 패트론의 구성은 상호 지속적인 관계 맺기의 일환으로 다양한 삶의 모습을 구가하며 진정한 주체가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공간의 사이즈를 늘리는 길이다. 2006.11.28 12:54 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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