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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구와우 돌배나무 골짜기
10월 23일 0시 30분, 23일이 되었다.
아직도 밖에는 빗물이 주룩주룩 소리를 내리며 내린다. 라면 끓이는 도구를 못 찾아 결국 굶고, 새벽으로 넘어간다.
어제 일행이 먹다 남겨 놓은 깡통에 등 안주용 삶은 밤을 몇 개 먹고 배고픔을 넘긴다.
캄캄한 강원도 구와우 골짜기에서 한잠을 자고 나니 희뿌옇게 하늘이 밝아 온다.
세찬 바람이 넓은 골짜기 전체를 휩싸고 있다.
구석구석 어두운 그림자 속에 야생 잡풀들과 나뭇잎들이 몹시 소리 내며 드센 바람에
시달린다. 비는 그쳤으나 지붕을 타고 내리는 간헐적인 물방울소리가 계속 들린다. 잠시 다시 누워, 전기장판 속에 배열된 전선을 따라 몸에 닿는, 전류의 따가운 열기를 느끼면서
여러 가지 생각에 잠긴다.
태백산맥 등성이에 부딛는 바람소리는 계속 드세다.
아침 7시
완전히 날이 밝아, 창문 밖으로 말라버린 배초향 허브 줄기와 성근 버드나무 잎들이, 그리고 자지러지게 팔락거리는 녹색과 붉은 색의 나무 잎들이 드러났다.
9시경, 냄비를 찾아 라면을 끓여 먹고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다.
밖은 바람이 불어 을씨년스럽고 썰렁하다.
다시 빗발이 창문을 적신다.
점심시간 쯤 올라온 구와우 주인과 오징어 덮밥을 시켜먹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다.
난로 옆 창문을 통해, 우물가 큰 나무와 골짜기를 내다보면서, 가을 풍경을 아크릴 물감으로 그려나간다. 내가 만든 판넬 위에 붙인, 밑 칠된 린넨 천위에, 적갈색으로 나무의 형태부터, 선 잡아 나가기 시작한다.
풍경을 맘먹고 그리기 시작한 것은 동학사풍경부터이다.
하긴, 그 징후는 철암그리기의 시작부터 인지도 모른다.
이제 풍경은 나의 신체가 되어야 한다. 오랜 시간을 옆 눈으로만 보지 않았는가,
젊은 날 눈의 현상학은 몸의 현상학이 되어야 하며, 지식으로서의 철학이 아닌 변화하는 자아와 자연과의 몸 섞임이어야 한다.
겸재 정선의 붓놀림보다 더욱 실질적이어야 하며 루시앙 프로이드보다 물질심리적이어야 하고, 리히터의 개념적 눈속임수를 극복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국 고전그림의 인간적 자연사상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럼에도, 저녁 늦게 내 그림은 평범한 풍경이 되었다.
내일 다시 고쳐야겠다.
저녁, 구와우 주인과 슈퍼에 가서 먹을 것과 소주 한 병을 사오다.
전차동 고깃집 계획을 이야기 하다가 과거 태백의 술집이야기에 이르렀다.
그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는다.
“어렸을 때, 한집에 한명씩 동원되기 때문에, 초등학생이지만 나가서 삽 들고 서 있기도 하였다.
광부들이 퇴근하면 바로 지나게 되는 화전 삼거리근처는 어룡, 한성, 황지광업소등은 종업원 1천오백명 이상이고, 그 밖의 군소광업소들이 20여 군데 있었다.
구와우 입구 혈암 탄 근처에도 4천명이상이 거주하였다. 화전 삼거리(당시 상구시장)이 죽으면서 현재의 자유시장이 활발해 진다.
인구가 늘면서 좁은 시장으로는 감당 못해 현대화 시키면서 자유시장 상권이 좋아지고,
상구시장은 00옥하는 니나노술집들이 늘어간다.
자유시장 통리 넘어가는 다리 양쪽과 현재의 너와집근처도 니나노 집들이 있었다. 근처는 쌀집 양복점 사진관 예식장(당시 사진관은 예식장을 겸함)이 생기고 시장 뒷골목은 창녀촌이 생겨난다. 그에 따라 화장품 옷가게도 덩달아 생겨났다. 결국 시장이 확대되고 황지의 경제가 활성화되어 지금도 소규모로 남아 있다.
당시 번화가는 현재 큰길 뒤편의 2차선 도로였다. 부서진 연탄으로 구워내는 센뻬이 공장에는 부서진 연탄을 대야에 담아가면 센베를 주기도 하였다.
풍전골(본래 서학골)에는 군소광업소가 많았다."
그렇구나, 80년대 겨울 여행중에 흘낏, 본 황지의 술집들은 화전삼거리였던가 보다.
추운 날, 까만 석탄과 대비되는 길가의 흰 눈, 화려한 한복과 짙은 화장의 여인 들,
그 경사진 두문동 재,
사온 소주가 다 떨어져 둘은 과일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24일 아침,
빵 두 쪽을 잼에 발라 먹고, 어제 그린 그림을 보충하고 수정하다.
‘돌배나무 골짜기‘그림1의 밑부분 배초 향 줄기 부분을 노랑과 붉은 갈색의 짧고 거친 터치로 바꾸다.
어제 보다 나아진 것 같다.
강원랜드 새로 짓는 스키장시설을 구경하고 조경팀장과 점심하다.
태백광산지역에 대한 이야기를 구와우주인에게 들으며 만항재로 넘어오다.
많은 산들이 고개 밑으로 펼쳐진다. 태백의 작은 줄기 산들,
캔바스가 택배로 도착해 있다.
‘돌배나무골짜기1‘의 하늘 부분을 다시 밝게 고치다. 한결 낫다.
밖에 나가 오일파스텔로 돌배나무 쪽을 작은 스케치 북에 가볍게 그리다.
택배로 부쳐온 캔바스 한 개를 가져와 흰색 아크릴 바탕칠을 하다.
서울에서 다시 올라와 사북에서 작업한다던, 이강우 선생이 급히 돌아 가야한다는 전화가 오다. 저녁을 태백에서 같이 하려던 약속이 취소되었다.
어제 먹다 남은 양념통닭으로 저녁 먹기를 때우고, 새로 밑 칠한 캔바스위에 스케치한 그림을 옮기기 시작하다. 하늘색을 더 푸르게 덧칠하다.
글래스고우 대학 타냐교수가 26일 온다는 연락을 받다.
토요일 임시로 해 놓은 학장과의 만남을 월요일로 옮기도록 해보아야겠다.
노산군 일지 작업 답사 차 26일 가려던, 경주 용장사 행을 바꾸어야 할 것 같다.
10월 25일
컴컴한 밤에 드러나는 검푸른 산등성이의 모습에 뭉클한 서정성을 느낀다..
새벽공기다 매우 차다. 아침에만 연탄을 2장이나 갈아 넣었다.
숨을 못 참고 자꾸 연탄가스를 들여 마시게 된다.
날씨가 쾌청하다.
바람이 별로 없어 어제 시작한 그림을 밖에 내놓고 그려나갔다.
울긋불긋한 거친 색의 붓 자국들을 가라앉히고 색을 보충하여 풍부히 하다.
언제나 하늘색이 문제다.
너무 짙은 청색을 밝게 바꾸다.
진홍 색으로 시작했던 돌배나무의 줄기도 색을 풍부히 하고 햇빛에 빛나는 명암의 차이를 더욱 강조하다.
고라니 한 마리가 왼 쪽 굵은 소나무들 사이에서 부시럭거리며 나오더니, 내 쪽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골짜기 쪽으로 달려간다.
엷은 갈색에 잿빛이 돈다.
마치 작은 노루새끼 같다. 기분이 흐뭇하다.
새로 2개의 캔바스를 흰색 밑칠하다.
원 화방에서, 베를린에서 그려온 천을 틀에 붙이는 작업이 끝났다고, 작업실로 가져온다고 한다.
집에 전화 걸어 천을 안 씌운 틀을 내주라고 알리다.
농장주인과 라면을 끓여서 남은 밥을 먹고, 잡풀과 까맣게 말라버린 해바라기들을 새로 그리기 시작하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보라색 줄기의 풀들은 ‘한국의 야생식물도감’(일진사)에서 찾아보니 개차즈기(Amethystea) 혹은 미국가막사리(Begger-ficks Stick tight)라는 식물과 흡사하다.
잘 되지 않는 그림을 억지로 만들면서 출발준비를 시작하다.
석양 햇빛을 받은 나뭇잎이 낯과는 전혀 다른 투명한 연두색을 내기 시작한다.
흰색으로 다시 바탕선묘를 그어 놓다.
4시 27분 양평행 기차를 타다.
다른 때와는 달리 혼자 올라오는 시간이 지루하다. 기차 내부도 한산하다.
가장 높은 기차역이라는 추전역을 지나 굴을 지나면서 내려다보는 골짜기의 물줄기가
광산개발후유증으로 붉게 오염되어 흘러내린다.
오염된 천의 붉은 물을 보면서 새로운 작품에의 생각이 떠올려진다.
카지노 사업으로 개발된 사북의 새로 들어선 건물들과 대비되어 우울한 기분이 든다.
경쟁적으로 산을 깎아 만드는 강원랜드와 절골유원지를 댐으로 막아 물을 공급한다는 태백의 스키장도 6년 전 태백 생명의 숲, 홍진표씨의 안내로 보았던 함백산 휴양림, 절골 자연스런 골짜기의 맑은 물과 오래된 천변의 자연스런 풍경에 대한 기억이 겹치면서 더욱 우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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