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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봉양여인숙 그리고 청령포
봉양여인숙에서 하루 묵었던 1970년은 석가모니에게 빚진 해 이다.
봉양 백련사에는 친구가 대학입시를 위해, 사람들 주로 친구들과의 접촉을 피해 머물고 있었다.
그곳을 우리는 기어코 또 놀러간 것이다.
친구들과 나는 며칠간 잘 대접받은 백련사에서 비용이 모자라다는 핑계로 야간도주하고, 친구는 창피하다고 같이 하산하게 되었다.
캄캄한 밤길을 책을 잔뜩 배낭에 넣어 어깨에 멘 친구와 우리는 따로 떨어져 걸어 내려 왔다.
참으로 철없던 시절이다.
그 후 한참을 그는 친구들을 만나지 않았다.
그보다도 주지스님은 우리의 야간도주행을 다 알고 있었을 것이다.
깊은 산속 기거하는, 귀 밝은 스님이 여럿이 부시럭거리는 한밤의 인기척을 왜 몰랐겠는가.
백련사 입구 평지에 있던 봉양의 여인숙은 내가 묵은 국내의 숙박지중에서 가장 진한 시골여인숙의 정취를 만끽한 기억을
남겨 준 곳이다.
감나무가 앞에 있었던가, 문 창살들, 장독대, 아침햇살에 부딪치는 반짝거리는 윤기나는 흰 쌀밥의 투명해 보이는 알갱이들, 아침 밥상, 콩나물, 묵은 총각김치, 따뜻한 아랫 목 이불밑의 감촉, 빤하게 좁은 뜰.
그 위치를 눈으로 어림짐작하며 제천을 향해 차를 달리곤 하였다.
또한 봉양은 이효석의 봉평과 그 발음에서 겹치면서, 혹은 봉평서 떠난 장돌뱅이들의 여정의 한 장소로서 더욱 정겹게 느껴진다.
봉양여인숙은 봉평과 제천을 오간 봇짐장사꾼들의 정취를 흠뻑 보여준 곳이다.
80년대 말을 전후해서 나는 이러한 정취를 경진이를 찾아갔던 해남의 한 여인숙에서 슬쩍 넘보는 기회를 가졌다.
하긴 경진이는 보성탄광 집 막내아들 성현이가 살아있던 86년 이래 지방의 밭떼기 농산물 거래의 여러 현장을 보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그의 영월삼거리 소 도살장은 물론이고, 정선의 경사진 고냉지 배추밭, 임계의 눈내린 벌판, 눈내린 황지의 석탄 꾸정물, 해남의 배추장사들, 반복되는 영월삼거리의 홍수, 영월시내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삶, 그 외에도 숱한 삶의 현장들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스스로도 소년의 낭만성이 짙은 기분을 버리지 못하는 그의 행적을 나는 은근히 즐긴다. 아니 친구들 모두 즐기곤 한다.
나는 그의 오마담사건이 그래서 좋다.
그것은 낭만주의 연애행각이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집앞 빛살 받으며 흘러가는 서강 강물을 바라보며, 불뚝 솟은 봉우리에서 뛰어 내리려 했다는 한 여성의 발걸음은
극에 달하는 고전극의 한 장면이다.
언젠가 마음이 내킬때 나는 이 그림을 그리고 싶다.
경진이는 투전판이 벌어지고 있던 여인숙방에서 나오며 반갑게 나를 맞았다.
전라남도 해남은 늦배추가 나오는 곳이라고 한다.
돈다발 전대를 배에 찬 배추 도매장사꾼들의 혹은 농산물 투기꾼들의 떠돌이 여인숙 생활을 넘겨 본 것이다.
낮은 천장과 슬레이트 지붕, 방과 방으로 이어지는 좁은 툇마루 수도꼭지만 있는
수돗가 알전등, 마당에 들어서면 여인숙 전체의 손님이 알 수 있는 빤하게 죽 늘어선
작은 방들...
언제나 그 방에는 다방아가씨들에 의해 커피가 배달되고, 밤에는 가끔 짓고 땡이 펼쳐진다.
장사밑천이 날라가는 일도 허다하다고 한다.
제천의 재래시장 뒷골목은 얼마전 까지도 이러한 떠돌이 인생판이 눈에 선한 장면을 많이 지닌 곳이었다.
경진이를 몇 번 따라 다니면서 이효석 소설 끄트머리를 읽고 있음을 느꼈다.
새로 뚫린 제천 영월도로는 제천과 영월사이의 도로에서 생각하던 상념을 송두리째 빼앗아 가 버렸다.
90킬로미터를 달릴 수 있는 새 도로는 이제는 단지 속도위반만 주의하는 단순한 길이 된 것이다.
빠른 속도가 인간에게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생생한 우리들의 감각을 빼앗아 가 버린다.
현대미술만이 좋은 것이 아니듯이,
덕분에 태백 철암 가는 길은 무척 단축되었다.
그렇지만 영월로 진입하면서 나의 시선과 기억은 머릿속에서 팽팽 돌아간다.
빠르게 달리는 차안에서도 이러한 기억과 회상의 속도는 그에 대응하여 더욱 빠르게 돌아간다.
희한한 일이다.
특히 나의 시선은 영월과 장릉, 소나기재 정상의 선돌 쪽에서 혹은 청령포 유원지 뱃 나루 쪽에서 보던 장소에 대한 기억과 꿰맞추기를 시도하느라 바쁘다. 방문현장의 기억을 반대편에서 다리면서 보는 시각을 통해 학인하려는 본능적 시각이다. 그것은 기억을 추적하는 순간적 시선이며 20년간 쌓인 영월 방문에의 경험이 풀어져 나오는 시선이다.
그것은 조선시대초기로 이어지는 시선이며 강원도 청령포에서 서울의 경복궁까지 혹은 사능에 묻혀 있는 일찍 남편을 잃은 한 많은 단종비 송씨부인의 시선에 닿아 있는 시선이다.
이러한 것을 보면 우리의 시선은 언제나 응시이다.
따라서 르네쌍스의 투시원근법이 얼마나 순진무구한 생각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의 눈을 유리창처럼 생각한 발상자체가 다빈치류 인간의 단순성을 증명하는 것이며 그림을 수학으로 해결하려 한 모순이다.
현대의 과학과 예술의 관계를 감안하더라도, 그리고 사진의 발달과 디지털 미디어의 전망을 감안하더라도 그러하다. 적어도 나의 시선에는 그러하다.
결국은 인간이 주체이며 인간의 눈은 인간의 기억 ,경험등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눈이다.
그렇지만 투시화법, 원근화법이 어느 정도의 사물에 대한 재현적 사실성을 보여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미술대학입시의 학생선발기준으로서의 정당성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더욱 문제일 것이다.
그래서 한국미술의 현실은 아직 어둡다.
우리의 잣대가 만들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수입된 미술은 우왕좌왕하기 때문이다.
대학입시가 대학교육과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인사동의 많은 실험적 현대미술작품들에서 이유없는 대학입시에 길들여진 석고소묘의 감각을 읽어 낸다.
아마도 노력만 한다면 비디오 작품들에서도 석고조각의 물질감을 읽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감각은 매우 미세하기 때문에 대리석과 석고의 차이를 본능적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단지 다빈치는 빛의 정보에 의해 우리의 신체의 떨림이 일어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무시하였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눈을 통하여 투과된 빛에 대한 정보는 그것자체로 사물을 재현하는 형상으로서의 정보이지만,
즉 인지가능 한 명암의 구분이지만, 물질의 원천적요소로서의 에너지이며 그 에너지는 우리의 신체를 진동시킨다고 할 수 있다. 그 진동은 눈앞에 보이는 사물로서의 대상이 또는 풍경이 우리가 뇌속에 혹은, 몸속에 지니고 있는 형상에 대한 기억을 에너지 파장효과 같은 작용을 통해 구분 짓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형상은 구체적인 것만은 아니며 인식가능 한 것만도 아니다.
아마도 민족이나 인류의 유전자적인 요소도 지니고 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여간 그림그리기는 이 축적된 정보와 함께 다시 자신의 신체의 울림으로 끌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붓 터치가 그것이다. 굳이 붓이 아니더라도 이러한 터치는 여러 가지 예술형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
미니멀리즘이 그러하고 육계의 감그림이 그러하고 퍼포먼스의 신체동작과 공기와의 만남이 그러하고 존케이지의 소리채취가 그러하다.
그리고 하나 더, 바넷 뉴만의 ‘일치(oneness)’가 그러하다.
순수한 시선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경험의 시선이기 때문이다.
좌측으로 내려다보이는 영월 서강의 청령포, 굵은 자갈밭 앞으로 흐르는 고요한 강물은, 언제나 숨죽이며 숨어 숨 쉬는 역사의 강물이다.
그리고 조선비극의 주류 물 흐름이다.
에메랄드 녹색을 띠고 봉우리사이로 흘낏 내려다보이는, 침묵하듯이 조용히 흐르는 이 강물은 슬픈 감정을 담고 흐르는 강물이다.
장릉 길옆, 소나기재 초입과 달리, 잘 뻗어 자라고 있는 소나무 숲속에 있는 관음송과 금표비 그리고 그 적막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큼 성큼 서있는 소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회색 바위 벼랑 밑 그늘 속으로 보이는 강물 색깔은
우리나라가 작은 반도국가라는 생각을 절대로 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공간은 동시적인 크기의 문제로서는 절대로 비교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 고요함과 천연스러움은, 일시적으로 역사적 존재로서의 우리라는 시간적 한계를 언제나 잊게 만든다.
그것은 규모가 작지만 시공을 넘어 원시적 자연의 공간감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동강위로 놓여진, 주체할 수 없는 초라하고 낯선 주황색 다리위로 지나면서 나는 또 한번 강원도의 산세를 강하게 느낀다.
이것은 홍천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나는 태백산맥이라는 남한의 마지막 남은 자연, 그러나 광산산업으로 멍들은 자연을 가슴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석항을 지나면 가슴 두근거리는 두문동재를 지날 것이기 때문에, 더욱 내 심장은 벅찬 호흡을 속으로 조절해야 한다.
창덕궁에서 보았던 어좌 뒷편의 병풍그림 오악도가 그 울긋불긋한 색채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사실주의 그림이라는 확신을 갖게 하는 수직의 늘어선 산들을 지나게 된다.
이것은 말년의 겸재가 그린 동해 바다 물결, 텀벙 출렁이는 통천그림의 수직선바위와는 정말로 수직 수평으로 엇갈리는,단단히 대지의 수평적 밑받침을 지닌 통쾌함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하늘과 갑자기 닿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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