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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와우에서의 넷째날, 퍼붓는 비 그리고 전시
2006. 7. 15. 토. 비 많이.
그림을 거는 날이다. 비가오고, 해바라기가 아직 덜 자란 관계로 축제 오프닝이 미뤄졌으나 저녁무렵 사람들은 그림을 걸기로 했다. 피곤이 쌓일만도 한데 그날따라 일찍 눈이 떠졌다. 다시 자려해도 잠도 안와서 씻고 몰래 먼저 숙소에서 나왔다. 혼자 숙소에서 나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걷는 것 뿐이다. 바람에 비가 조금 묻어났다.
절골에서 구와우까지 걸어가보기로 했다. 날씨가 좋지 않았으나 아침 공기가 상쾌했다. 바람에 젖은 머리가 금새 말랐다. 동네 가게에서 물 한병을 산 뒤 걸어가는데 한가롭게 놀던 강아지 두 마리가 졸졸 따라왔다. 한참을 따라오길래 쫓아보내고 다시 갈 길을 재촉했다. 조금 가자 지하도가 나왔다. 인도가 없는 약간 꺾인 길이다. 좀 위험해보이긴 했지만 차가 그리 많지는 않아 다행이다. 지하도를 지나자 익숙한 시내 길이 보인다. 'five hundred miles'란 노래가 내가 걷는 태백의 풍경과 잘 어울린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구와우로 들어가는 오르막길에 접어들었다. 차들이 쌩쌩 내 옆을 지나간다. 바람이 거세지더니 이내 굵은 비를 뿌렸다. 가지고 있는 우산은 거의 수평으로 내리치는 비에 거의 소용이 없었다. 또 본의아니게 비를 맞는다. 걷고 있는 길 자체가 내겐 큰 의미를 갖는다. 늘 이런 길을 끝도 없이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어느 한군데 정착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게 들때까지 말이다. 실현하기 힘든 환타지같은 것이라 더욱 손에 잡고 싶은 것일까?...
길 위에 간격을 멀리 두고 왠 신발짝 한켤레가 놓여있다. 차들이 그 신발들을 밟고 쌩 지나간다. 상황에 걸맞지 않은 물건이 쓸쓸한 이상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또 바로 앞에는 차에 치어 죽은 개의 주검이 길가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다. 생각보다 그리 끔찍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걸었다. 여름.. 강원도의 산과 들은 그 야생성을 한껏 발하고 있다. 자연은 본래 가차없는 생존의 논리에 따라 살아가는 이기적 존재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인간을 위해 베푼다느니 포용한다느니하는 말은 그저 인간들의 자기중심적 발언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생명력을 한껏 뽐내며 녹음을 자랑하는 눈앞의 자연에서 동시에 죽음을 바라본다. 개의 시체 위에서 붕붕대는 파리떼에게서도 그 비슷한 것을 생각한다.
홀딱 젖어서 구와우 사무실에 도착하니 허윤희 선생님이 먼저 와 계신다. 옷을 말리며 좀 쉬고 있자니 다른 일행들이 도착하고 식당에서 아침을 먹었다. 여러가지 약초 향이 풍기는 산채비빔밥이다.
이때부턴 뭘 했었나?... 음, 다시 컨테이너 작업실로 돌아와 아침에 걸어오면서 느꼈던 것들을 그려보았다. 길 위의 신발, 죽은 개와 산, 며칠동안 이곳을 여기저기 돌아다닌 나의 발... 하나의 짧은 문장이나 단발적인 생각의 편린같은 그림이다. 그리는 동안 며칠간의 구와우에서의 생활, 이런저런 생각들이 정리되면서 집중이 되었다. 분명 그림을 그리는 일이 명상과 밀접한 관련성을 갖는다. 비가 계속해서 내리는 관계로 사람들은 두 개의 컨테이너 작업실에서 조용히 그림을 그렸다. 금새 점심시간이 되었고 그때부턴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다. 굵다란 빗줄기가 계속해서 퍼부었고 오후 느즈막히 점차 커져가는 빗소리를 따라 사람들의 손도 더 빨라져갔다. 왼쪽 방에서 창문을 열어놓고 큰 종이에 그림을 하나 더 그렸다. 쏟아지는 비에 건너편의 산과 나무들이 서로 섞여 씻겨가는 것 같았다. 그때의 빗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잠시 정신이 나갈 것 같이 집중을 할 수 있었던 순간도 있었다. 물이 방 앞까지 차올랐다.
서울에서 처음보는 사람들이 도착해서 사무실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원주에서 우열이도 왔다. 우열이는 구와우 작업실을 본 소감을 히피들의 소굴?같다고 말했던 것 같다.
식당에서 조리장님이 만들어주신 꽃 샐러드를 천천히 음미하면서 먹고 당귀동동주를 마시며 천천히 긴장을 풀어본다. 빗소리가 여전히 크게 들렸던 것 같고 숨 쉴때마다 쌔-한 풀냄새가 났다. 이때 이미 거의 긴장이 풀렸다. 해가 지고 사람들과 함께 구와우 전시장에 그림을 걸기 시작했다. 그림을 먼저 배열해 붙이고, 그 위에 투명한 필름을 덮어 태커로 박았다. 푸르스름한 형광등 아래 전시장의 모습이 갖추어져 갔다. 디스플레이가 끝나고 흙바닥에 모두가 둘러앉아 소감을 얘기했다. 그렇게 이야기하기에는 익숙치 않은 사람들이 많다. 형식적인 인사 뒤에 결국은 한번도 이야기하지 못한 3박4일간의 구와우에서의 서로에 대한, 또 그림에 대한 이야기들이 아쉬워 술잔을 들었다 놓았다, 앉았다 일어났다 했다. 어떤 사람들은 전시에 대해 새롭거나 도전적인 작업들은 아닌것 같다며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철암그리기를 바라보는 시각도 어쩜 비슷할지 모르겠다. 나는 왜 여기서 이렇게 그림을 그리고 전시를 하는 것일까? 내 그림은 뭘 그려낸 것일까? 너무 편안하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쓰디쓴 말씀처럼.. 단 한장을 그려도 그렇게 그려선 안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스쳐가는 말들에 일일이 신경쓸 필요는 없을거다..
웅성웅성 뜨거워진 얼굴만 기억나는 오프닝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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