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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와우에서의 셋째날, 세잔.
2006. 7. 14. 금. 오전에 잠시 맑다가 흐리고 비.
어제 꾀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데다 잠도 늦게 자서 좀 늘어지는 감이 없지 않았으나 아침을 먹은 뒤 구와우의 공기를 마시고서는 금새 생생해졌다. 아침나절 잠시 쨍하고 햇빛이 났다. 역시나 화판과 무거운 그림도구들을 챙겨가지고 그릴 장소를 탐색했다. 그것들을 들고 멀리 가기엔 힘들었다. 사무실에선 동쪽으로 좀 더 떨어진 오두막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해바라기가 길 옆에 많이 쓰러져 있다. 나무 화판이 무거워 한 다섯걸음 걷다 쉬다를 반복하며 어찌어찌 도착했다. 서쪽으로 매봉산(정확한지는 모르겠으나 풍력발전소가 잇는 곳)이 장쾌하게 바라다 보이는 장소이다. 개인적으로는 그림의 소재로 풍경이 한눈에 조망되는 곳을 별로 선호하지 않지만 오랜만에 흰 구름들이 지나가는 파란 하늘이 반가웠고, 멀리 산 표면의 촉각을 그려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류선생님께 빌린 4B연필로 대강의 능선을 그리고 빠른 선으로 지나가는 구름을 잡아보려 했다. 구름은 멈춰있지 않아서 매력적이다. 그것의 움직임의 흔적이 빠르게 퍼져나간다.
이번엔 장선생님이 빌려주신 굵다란 흑연으로 능선 위의 나무들의 색감과 질감을 포착해보려 애쓴다. 전반적으로 이전의 철암에서의 그림들에 비해서 손의 움직임이 빨라졌음을 느낀다. 흘러간 연필의 흔적에는 미련이 없다. 잘 그리고 못 그리고의 구분도 별 상관이 없다. 적어도 그릴 당시에는..^^
연필을 쓰면서 어제의 그림들 보다는 좀 더 시간을 갖고 세세하게 그려나갔다. 그림의 소재나 구도 때문인지 옆에서 함께 그림을 그리시던 장선생님이 세잔의 생 빅투아르 산이 떠오른다고 하셨다. 구와우에서 작업하는 동안 '세잔과의 대화'라는 책을 내내 끼고 있었는데 그런 영향인지도 모른다.
잠시 책 속 세잔 어록을 빌려와 본다.
예술이란 섬세한 감각을 드러내는 것이다.
감각은 개인을 특징지으며, 그것이 완벽의 경지에 이르면 예술가를 구별짓게 된다.
예술에 대한 모든 사고보다 예술가들이 먼저 갖추어야 할 것은 뛰어난 감각이다.
재능이란 일상에서 마주치는 것들에 늘 새로운 감정을 품는 능력이다.
예술가에게 본다는 것은 곧 이해한다는 것이고, 이해한다는 것은 곧 구상한다는 것이다.
새가 소리를 변조하듯 직접 감정을 표출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술가들은 구성을 하는 것이다.
색조의 대비효과와 상관관계! 윤곽선과 형체의 비밀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연이란 입체적인 것이다. 화가와 모델의 사이에는 면과 대기층이 가로 놓여 있다. 공간 속에서 물체들이 볼록하게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곧 대비시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술가라 해도 즉각 사물들을 비례 관계를 깨달을 수는 없다. 예술가는 그것을 직감으로 알 뿐이다.
순간적인 느낌을 세부적으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스타일이 생겨난다.
그림의 기법은 자연과 마주하면서 만들어지며 상황과 부딪히면서 발전해 간다. 따라서 기법이란 느낀 바를 표현하고 감정을 개인의 미학으로 설계하는 것을 말한다.
자연을 본다는 것은 모델에서 특징을 추출해내는 것이다. 그림이란 대상을 엄밀하게 모방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수많은 관계들 속에서 조화를 찾는 것이며 그것들을 새롭고 독창적인 논리로 다시 배열하는 것이다.
(세잔과의 대화. 다빈치. p85~89)
전시장 옆 새로 만들어진 식당에서 강원랜드 조리장님이 만들어주신 돈까스를 감동스럽게 먹은 후 다시 그림을 그리러 원두막에 갔을 땐 눈 앞에 온통 안개가 가득했다. 몇 미터 앞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그림을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가? 오전 내내 망막에 맺혀있던 산의 색들을 다시 재생시켜 아크릴릭으로 엷게 칠했다. 색이 연필의 선을 무마시킨 것 같아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연필로 꾸준히 드로잉을 해야겟다는 생각을 반복해서 했다. 늘 실천이 문제다.
(7.24 덧붙임)
이날 오후시간은 어떻게 갔는지 잘 기억이 안나는 것 같다. 해바라기 밭에 섞여있는 오두막에서의 그림을 정리하고 컨테이너로 와서..그렇지.. 안개가 심상치 않게 자욱해서 산책로를 따라 올라갔었다. 산간지방의 날씨가 변덕스럽고 구름이 내려와 깔리는 건 다반사라는 걸 알지만 그 날 처럼 인상적으로 안개가 피어오르는 것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혼자 안개를 비집고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면서 정은화 선생님의 말씀처럼 마치 저 세상을 경험하는 것 같았다. 현실 세계를 잠시 이탈한 것 같은 느낌이랄까.. 앤디선생님의 설치작품을 지났을 때 즈음 길가에 꼼짝않고 앉아있는 개구리를 만났다. 어제는 등이 완전히 까맣고 배가 빨간 개구리를 보았는데 이번엔 녹색에 검은 점박이 등에 역시 빨간배다. 배석빈 선생님이 독 개구리라고 하셨는데 그래서 그런지 녀석이 내가 옆에 앉아서 빤히 쳐다봐도 미동도 없었다. 생존을 위한 전략일까? 옆을 지나가도 꼼짝을 않는다. 외계인을 만난 듯이 익숙치 않은 생물체와 대등한 존재로 만난 듯 했다. 이곳에 온 나는 손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갑자기 비가 오기 시작해서 난 또 비에 젖어 컨테이너로 돌아왔다. 이래저래 매일 비를 맞았다. 화판을 다시 펴고 좀 전의 경험을 그려보았다. 약간 다른 방식이지만 직접 대상을 보지 않고 몸에 새겨진 느낌과 경험을 천천히 그려본다. 자욱한 안개와 그 위의 몇몇 생명체들..사람. 식물의 몸짓 같은 것.. 하지만 무언가 빠진 것 같다 그림이...
그러고 저녁을 먹으러 시내에 나갔던가? 옹심이 집에 갔을 거다. 그리고 며칠째 안으로 쌓여왔던 무언가를 쏟아내고 싶어서 마다하던 술을 조금 마셨던 것 같다. 갑작스레 말도 늘었을껄. 한 참을 그렇게 앉아있다가 다시 구와우로 돌아갔다. 정은언니와 혜영이는 마지막날을 앞두고 야작을 하겠다고 야단이었다. 정은언니는 식당에서 청양고추까지 챙겨왔다. 그리고 정말 컨테이너 작업실에서 그걸 옆에 놓고 그림을 그렸다. 작업실엔 점차 그림이 쌓여간다.
사장님과 배석빈, 김정락 선생님이 계신 식당으로 가서 끼었다. 좀 지나자 류장복선생님, 혜영이, 그리고 사무국장님도 오셨다. 당귀동동주가 매우 달았다. 사람들과 이야기할 시간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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