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인
  뒤늦은 일기- 7월 구와우 작업일지1(7/12,13)
  http://blog.yahoo.co.kr/somuz001

7월 구와우에서 있었던 일을 집에 돌아와 7월 20일부터 기억해서 기록해 두었습니다. 뜬금없지만 한번 올려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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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7.12 ~ 13 일지


2006. 7. 13. 목. 흐리고 비, 바람 많이 붐



전날 오후 3시쯤 태백에 도착해 짐을 풀고 산책로를 따라 사람들과 한바퀴 돌아보았다. 해바라기는 아직 반 정도 밖에 자라지 않은 것 같고 비바람에 상당 부분이 쓰러져있기도 했다. 그래도 전년도에 비해 산책로 곳곳에 오두막이며 의자들이 놓여 있어서 좀 더 안정적인 느낌이 들었다. 한 바퀴,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5일동안 이어질 이곳에서의 생활을 짐작해 본다. 아니, 우선은 이 공간에 내 몸을 적응시키는 것이 우선이었다. 워크샵, 전시의 이유로 머물게 되었지만 결국은 나의 몸이 구와우라는 공간에 얼마나 밀접하게 스미느냐가 관건이라는 생각을 했다.
다행히도 나는 여타의 환경들에 잘 적응을 하는 편이다. 우선은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잠자리나 위생시설도 왠만하면 견딜 수 있다. 물론 잘 갖춰져 있는 곳이 좋지만.. 대학 3학년때까지 갔었던 농활에서도 그곳의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나중에 서울에서까지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이유때문이었던 것 같다.
우선은 나 자신이 열려 있어야 한다. 구와우의 바람소리과 식물의 냄새, 흙의 감촉 같은 것들을 느끼며 금새 생활을 위한 준비를 마쳤다.




13일 아침. 숙소에서 나와 시내에서 황태 해장국으로 파리를 쫓아가며 아침을 먹고 구와우로 왔다. 우선은 전지크기의 종이를 댈 나무화판이 필요했다. 화판이 필요한 몇몇 사람들과 함께 사무실 근처에서 나무판을 구하고 사무실 앞으로 차로 날랐다. 배석빈 선생님은 톱으로 판을 자르고, 혜영이는 둘레를 테이프로 감쌌다. 철암그리기에 참가한 이래 가장 큰 그림을 그릴 준비를 한 것이다. 무거운 화판에 종이, 이런저런 드로잉 도구들, 카메라까지 둘러메고 나는 첫번째 그릴 장소로 사무실에서 가장 가까운 원두막으로 갔다. 바람이 많이 불어서 더 위쪽으로 가기엔 힘들었다.

화판을 펼쳐 종이를 붙이고 적당한 위치를 점한 다음 목탄을 꺼내들었다. 빠른 스케치와 느낌을 표현하기에 목탄이 적당하다고 생각되었다. 원두막에서 보이는 풍경은 이런저런 꽃밭이 조성된 산책로의 초입부분과 언덕 위의 나무들이 서 있다. 바람때문에 쉴 새 없이 나무들은 제 몸을 흔들고, 무언가 손짓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을 볼 때면 어김없이 내가 살던 옛 동네의 집 앞의 커다란 사시나무들이 생각난다.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떨리던 나뭇잎들은 햇살에 반짝이고, 그것은 사람의 머리인 것 처럼 생각되었다. 가끔은 옥상에 앉아 그 나무들과 중얼중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내가 어떤 말을 내뱉으면 나무들도 나를 보고 어떤 대답을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소녀시절의 감수성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쨋든 지금은 무참히 뽑혀나간 그 때의 나무들은 내 친구와 같았고 그만큼 자연을 대하는 태도에 영향을 준 것임에 틀림없다.

마음을 가다듬고 바람 소리와 그것이 나뭇가지를 스쳐갈 때의 움직임에 집중해보았다. 손이 눈의 움직임에 따라 표면을 훑으며 지나간다. 나는 굳이 내 앞의 풍경을 정확히 재현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풍경 안에 들어앉아 있는 나 자신의 시간과 눈앞의 대상과의 관계, 그리고 공간의 느낌의 기록이 더 중요하다. 그것의 생생한 표현이 그림의 목적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집중을 요한다. 살아있는 생명력에 다가가고자 하며 그것에 나를 동화시킨다. 다양한 식물의 형태와 표면을 따라 내 손의 움직임, 선의 느낌도 달라지게 하였다. 그 모든 다양성을 각기 다른 선의 느낌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노력은 매우 중요하다. 손의 움직임의 범위를 늘리고 습관적인 선을 넘어서는 다양한 선의 구사는 그만큼 표현의 범위를 넓히는 것이다. 사진을 보고 그리는 것과 실재 자연을 대상으로 하여 그리는 것의 차이는 이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선의 사용에 있는 것 같다. 물론 그 원인은 정지된 하나의 시점의 이미지를 보는 것과 실재 공간 안에서 시시각각 달라지는 자연의 모습과 그림을 그리는 자신과의 관계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되짚어보는 과정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 내가 방금 그어낸 선이 결과적으로 정확한 것이었는지의 여부는 결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선이 만들어질 당시의 내가 공간 안에서 대상을 바라보며 가졌던 느낌의 해석, 관계설정의 연속된 과정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자연 속에서 그림을 그리는 '사생'의 말뜻을 찾아보면 객관이 주관에 지각되어 마음속에 비친 것을 파악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되어있다. 결국은 대상을 통해서 내 안에 들어서게 된 상 혹은 생각을 끄집어내는 일이 사생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대상의 사실적인 묘사, 원근에 의한 정확한 비례와 투시는 필수적인 요소가 아닐 수도 있다.(참조글의 그림1)

나는 사생을 하되 그림 그리는 사람의 보다 적극적인 움직임을 담아볼 생각으로 첫번째 그림을 말리는 동안 화판과 목탄을 들고 원두막을 나왔다. 원두막에서 한참을 바라보았던 풍경안으로 더 가까이 들어가 길 바닥에 화판을 놓고 종이의 아랫부분부터 조금씩 그려나갔다. 시야는 더 좁아져 바로 앞에 보이는 것들이 종이위에 옮겨졌다. 길, 그 위의 풀, 돌조각, 길 옆의 나무, 풀... 조금 그리다가 다시 좀 더 올라가서 그리고, 또 좀 더 올라가서 그리기를 반복하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종이가 젖어 목탄이 올라가질 않고, 종이가 때밀리듯 밀렸다. 좀 더 올라갔을 때는 완전히 젖어서 더 이상 그려지지가 않았다. 점점 더 빨리 손이 움직일 수 밖에 없었고, 나중엔 형태가 비슷한지의 여부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그림2)
이렇게 그려진 각각의 형태들은 고정되지 않고 서로의 형태들에 영향을 주게 된다. 길을 그려낸 것이 나중엔 나무등걸처럼 보일 수도 있고, 풀을 그린 것이 구름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것이 정해진 의미와 기호로써 보여지는 것이 내게는 중요치 않다. 오히려 움직임과 시간의 기록에 더 관심이 간다.

점심을 안먹은 데다가 비를 맞으며 화판을 끌고다니느라고 몸이 많이 지쳐 내려왔다. 해가 저물무렵 서선생님의 친구분들이 오셔서 저녁을 해결하고, 다른분들이 담소를 나누는 동안 나와 정은언니, 혜영이, 김정락 선생님은 휴대폰 불빛에 의존한 채 언덕을 올라 별구경을 했다. 구와우에 머무는 일주일 동안 별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날이었다. 느리게 지나가는 별똥별도 보았다. 하늘이 정말 동그랬다. 많게는 수십억년을 달려온 별 빛을 보며 잠시나마 현실의 좁아진 시간대를 잊었더랬다. 숙소로 돌아와 '티 없는 마음의 영원한 햇살'이란 영화를 네 번째로 숨죽여 보고는 느즈막히 잠이 들었다.
[인쇄하기] 2006-09-18 03:2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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