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가의 생각과 감성이 어떻게 조형의 원리와 기법으로 나타나는가. 종이에 아무렇게나 그어진 필선이라 하더라도 하나의 기법으로 분류되고 기법은 조형의 원리에 준하며 조형원리는 그에 상응하는 하나의 관점을 요구한다. 관점은 곧 가치관이자 세계관이다. 세계관은 세계와 나와의 관계설정이다. 그렇다면 우연적으로 발생한 필선이라 하더라도 행위 주체의 인식여부와 상관없이 우주적인 세계관과 연결된다. 지극히 개인적인 미적 성과라 하더라도 시대의 가치관이 그것에 투영되기 마련이다. 김우창이 그의 저서 풍경과 마음에서 말하듯, 단순한 묘사인 경우에도 한 사회가 지니는 인간의 우주론적 혹은 도덕적, 사회적인 위치에 대한 서사를 포함한다. 미술작품은 한 화가의 소유물이기 이전에 단지 그를 통과하여 현현된 사회적 산물이다. ‘왜 그리는가?’1) 라는 근원적인 물음에 불성실하다면 기존의 패러다임에 기대어 그저 소비를 일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와, 사진처럼 똑같다! 흔히 그림솜씨에 감탄하는 말이다. 사진적 재현의 정확도가 사물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쉽게 나오는 말일 수 있다.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투시원근법적 공간이나 광학적 이미지를 사물에 덮어씌워 판독한다. 원근법의 시각체계가 세계의 이미지를 드러내는 강력한 도구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원근법적 지각방식을 단순히 소비하는 것에는 비판의 여지가 크다. 더구나 어떻게 해서라도 입시관문을 통과해야 하는 작금의 현실에서 원근법의 훈련과정이 거의 맹목적으로 이루어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격자의 수학적 좌표공간으로 세계를 설명하고 광학적 기계의 눈으로 사물을 현상하는 시각체계의 배후에는 서구적 사유의 흐름이 있다. 현실공간을 개념화하는 지식체계로서 원근법적 패러다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원근법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기법 숙련 위주의 미술교육의 병폐를 줄일 수도 있지만 아울러 현대미술의 제 양상을 전통으로부터 파악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르네상스 이후 400년 동안 서구를 지배한 원근법은 서구현대미술의 밑바탕에 자리한다.
한 철학자가 서구의 긴 사유의 여정이 플라토니즘에 대한 나른한 각주에 불과하다며 자조 섞인 일성을 내뱉었듯이, 기독교 정신과 플라톤의 세계관이 어떻게 회화 이미지의 재현에 원천적으로 개입했는지 밝혀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빈 공간성과 찬 입체성의 조형적 원리의 차이와 기법의 효과를 우리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과 태도에서 엿볼 수 있다. 사진과 회화는 어떻게 같고 다른가. 개념적인 격자의 좌표공간과 카메라 옵스큐라의 광학적 이미지가 세계를 어떻게 조망하는지 회화와 사진의 공간의 차이를 구별하는 것은 이미지의 홍수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또한 의미 있는 일이다.
20세기를 넘어오면서 전통적인 원근법의 개념적 회화공간을 포기하고 회화의 감각적 사물성을 적극적으로 추구하게 되면서 이제 까지 볼 수 없었던 스타일의 작품들이 쏟아져 나온다. 예컨대 원근법, 선 원근법은 수학적인 좌표를 설정해 현실을 재현하고 이를 바탕으로 하는 아카데믹한 재현의 개념성은 과학적인 광학의 발달에 힘입어 신의 세계를 모방함으로써 권력을 유지했다. 19세기 초 사진기가 출현하고 사진은 착오 없이 양질의 이미지를 반복해서 생산하는 막강한 재현력으로 기존의 화가를 손쉽게 능가한다. 회화는 심리적인 주관성을 바탕으로 재현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사진과의 차별을 기할 수밖에. 그런데, 모네의 회화가 작위적인 인상주의의 소비에 불과한 건 아닌가. 세잔이 추구하는 추상성과 현실성이 어떻게 그의 회화공간에서 모순적인가. 지향적인 작용 그것 자체에 그의 회화는 존재한다. 반 고흐의 붓질에 묻어나는 살점들! 그 꿈틀거리며 발산하는 생명력은 어디서 오는 건가.
1907년 피카소의 회화 ‘아비뇽의 처녀들’을 필두로 큐비즘이 등장하면서 다시 개념적인 회화가 주류로 등장한다. 무엇이 예술일 수 있는가. 마르셀 뒤샹은 기성품인 소변기를 뒤집어 샘이라는 제목을 붙여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다다이즘은 폭력적인 현실에 무력한 예술의 고고함을 비판하며 본질적으로 무의미함의 의미를 부르짖는다. 아무것도 아닌 일상적 오브제를 예술작품의 요소로 취급한다. 초현실주의는 자동기술법으로 의식의 영역을 무의식으로 확장한다. 미술의 양상은 다양한 이즘을 표방하며 세계대전을 두 번 겪는 20세기 문명의 복잡성을 대변하듯 변신을 거듭한다. 과연 피카소가 20세기를 열었는가. 큐비즘의 시각체계와 피카소의 야생성이 어떻게 회화 내적으로 반목을 거듭했는지 살펴보는 건 20세기 현대미술의 심장을 해부하는 바로미터일 수 있다.
지적 개념주의가 모던의 조건인가. 현대드로잉의 지적 개념성은 건축설계도면처럼 회화의 무생물성을 더욱 강화시킨다. 개념주의 화가 솔르윗이나 도널드 저드는 작품을 아예 주문 제작한다. 잭슨 폴록의 드리핑 회화 또한 뿌리기의 개념적인 전략을 통해 가능하다. 개념을 전달하는 수단으로서 감각의 영역은 한정되고 위축된다. 그림을 그리는 순간 대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기억에 의존한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는 더 짧은 그 순간에는 그리는 물리적인 행위와 감각만이 작동하기 때문에 기억이 실제로는 개입하지 못한다. 감각은 개념을 실어 나르는 수단이 아니다. 감각과 개념은 불연속적으로 작동한다. 감각이 개념의 귀납적 수단이 아닌 것처럼 개념 또한 감각의 연역적 수단이 아니다. 감각은 또 다른 감각으로 이어지고 개념은 또 다른 개념을 부른다.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그림이 생각보다 빠르다고 말한다. 순수감각의 물질화의 과정은 일루전의 형상성에 앞선다. 개념은 비평적 거리를 통해 동원된다. 개념은 그림의 전후에 작동한다. 하나의 개념이 있어 감각이 비로소 일어나는가? 최초에 감각의 소용돌이가 있을 뿐이다. 감각과 개념은 불연속적으로 두가닥의 선처럼 꼬여있다. 엄밀하게 말해 그림은 조작이 아니다. 인위적인 조작은 그림 밖에서 세상에 그림이 존재하는 방식에 관여한다.
현대미술은 일반적으로 감각적 사물성 보다 개념성을 강화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미적 경향과 비판적 거리를 둔다면 회화의 감각적 사물성의 회복에 염두를 두어야 한다. 회화는 사진적 재현의 완벽성을 좇는, 낳은 자식을 닮으려는 아비의 기형적인 불구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사생은 개념적인 회화의 창백함을 극복하려는 대척점에서 제시되는 방법론적 대안 가운데 하나다. 한편 회화매체는 여전히 효과적인가. 인류가 시작된 이래 회화는 동굴벽화의 울퉁불퉁한 면에서 상을 추출하려 했을 때부터 기록과 표현으로서 현실과 나란히 존재하는 또 하나의 엄연한 공간이다. 영상, 설치 따위의 매체예술이 부각되는 작금의 상황에서도 회화매체의 평면성은 따라서 근원적으로 유효하다. 그리고 분류주의에 입각한 지루한 회화사의 촘촘한 그물망에 잡히지 않는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거대한 나머지일 것이다. 륮.
-----------------------
1) 왜 그리는가? 라는 물음에 답하려면 스스로를 들여다보며 즐기든, 세상을 향해 말을 걸든지 간에 먼저 자기 정체성이 요구된다. 근원적인 결핍으로서의 정체성은 선택적으로 취하거나 버릴 수 있는 어떤 게 아니다. 계단을 밟아 올라 딸 수 있는 과실이 아니라, 스스로 쌓아올린 지반을 통해 그러하게끔 되는 어떤 거다.
2) 압축적으로 진행된 근대화의 과정을 돌이켜 볼 때 모든 분야에 걸쳐 생산성의 가치가 무엇보다 우선시되는 환경에서 입시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 경쟁체제는 소통의 장으로서 미술교육을 줄곧 왜곡시켰다. 미적 체험과 소통, 이해의 과정은 파행적일 수밖에 없다. 행정 편의주의는 분별이 쉬운 조형의 객관성을 선호했고 이에 적합한 조형의 방법론으로 원근법의 과학성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부추겼다. 결과적으로 미술학도들은 기계적인 단순 묘사력을 키우는데 집중하게 되었다. 예컨대 창작 주체의 생각이나 감성을 잘 표현하기 위해 분명한 작품의 형식이 필요하다. 형식은 내용을 담보하는 궁극적인 수단이다. 미술학도에게 기법의 연마과정은 중요하지만 작품의 형식은 맹목적인 기법의 세련된 변주가 결코 아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