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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기행
2006.7.28 금요일
십수 년 만에 황호경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남도 섬 역사문화 기행에 참여하지 않겠느냐고 묻는다. 그는 광주 신세계 갤러리의 큐레이터로 근무한다. 흔쾌히 수락했다. 하루 전날인 27일 목요일 밤 차에 화구를 잔뜩 싣고 일산을 출발하여 깜깜한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렸다. 휴게소에서 새우잠을 자고 일치감치 완도에 도착했다. 광주에서 출발한 일행이 당도하려면 아직 멀었다. 해물 칼국수로 요기하며 식당에 붙어있는 지도를 보았다. 노화도 아래 보길도와 소안도가 있고 완도 옆에 신지도와 청산도가 있다. 선창가에 나가 먼 바다를 보았다. 집중호우로 전국이 요란한데 따갑도록 날이 쨍하다. 변신을 거듭하는 큰 구름 아래 보길도가 저 멀리 보이고 고요한 바다에 떠있는 부표가 이따금씩 반짝거린다. <10:52> 그 옆에 노화도 하늘에도 구름이 가득하다. 그렇게 큰 구름을 언제 보았던가. <10:59> 일행이 도착했다. 2박 3일씩 4차에 걸쳐 진행되는 답사 가운데 3차 팀이다. 인솔을 맡은 대동문화 조상열을 비롯하여 화가와 사진가, 학생들과 동영상 촬영 팀을 포함해서 모두 12명이다. 승선을 마치자 철부선은 서서히 몸을 돌려 바다를 향해 나아간다. 전망 좋은 난간에 기대어 힘껏 바다 냄새를 맡아본다.
소안도 길가에 후박나무가 즐비하다. 섬사람이면 너나할 것 없이 누구나 후박 열매를 따다 자식 공부까지 시켰는데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후론 어림도 없다. 얼마 후 잘 차려진 점심상이 우리를 반긴다. 된장처럼 접시에 퍼 놓은 것이 성게 알이다. 장어탕에 장어가 너무 많아 국물이 없다. 양념 고추장에 무쳐 놓은 해삼이 별미다. 허름한 음식점에 한 상이 휘어지는데 벽마다 그림이다. 그저 그런 상화와 격이 다르다. 군청에서 행정지원을 나온 유영인의 사진작품도 벽에 걸려 있다. 예사롭지 않다. 그는 높은 톤으로 남도 사투리를 빠르게 구사한다. 말을 흉내 내어 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작은 양식어선을 타고 서핑이라도 하듯 당사도를 향해 갔다. 뭍에 닿자 숲 가운데로 난 하얀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내리막길 위로 짙푸른 바다가 넘실댄다. 본래 항문도에서 자지도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당사도로 불린다고 한다. 바뀔 만하다. 등대가 있는 섬 꼭대기에 다다랐다. 당사도 앞바다는 예로부터 주요한 뱃길이다. 미역 따러 갔다가 아이 업고 나온다는 외딴 섬이 여기저기에 있다. 섬마다 세워진 열녀비가 수상쩍다. 커다란 나팔모양의 구조물이 눈에 띈다. 안개가 자욱하여 등대의 빛이 못 미칠 때 소리로 알린다. 정원의 한 쪽에 등대 탈환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그 옆에 일본인들이 세운 순직비가 깨져 있다. 단층 건물 옆에 큰 소나무와 철탑이 있고 등대가 보인다. 숲이 울창하고 바다와 하늘이 깊다. <14:50>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니 까마득한 절벽 아래 부서지는 파도의 흰 거품이 짙푸른 바다의 치아처럼 빛난다. <14:50> 뜨거운 햇빛에 달구어진 전망대의 콘크리트 바닥에서 그림을 그리자니 고역이다. 까만 목탄 자욱 속으로 들어가고만 싶다.
바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양식어선을 타고 다시 소안도로 나왔다. 임진왜란 때 피난 온 동복오씨와 김해김씨가 입도하여 정착하게 된 소안도는 독립투사 송내호 선생을 비롯하여 기개가 용맹스러워 100년을 안심하고 사는 동네다. 1990년 주민의 성금으로 소안학교를 복원하고 항일 기념탑을 세우고 자료를 모아 전시관을 지었다. 동상과 벽화와 부조, 특히 홀로그램을 이용한 미니어처는 실감을 더해준다. 전시장 한가운데 천정에 닿을 듯한 높이로 재현된 당사도 암벽이 설치되어 있다. 낫 따위로 무장한 네 명의 귀여운 독립투사 인형이 등대를 탈환하기 위해 기어오르고 있다. 주민들의 자부심이 느껴진다. 일자형 학교건물과 너른 마당이 정겹다. 소안도의 역사를 간추린 동영상을 관람한 후 이동하여 미라리 해변에 들어섰다. 몽돌과 상록수와 바다가 아늑하게 펼쳐진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성장한 해송의 자태가 고즈넉하다. <17:18> 다시 이동하여 선착장에 차를 세워두고 선잠으로 피곤한 몸을 뉘었다. 착오가 있었는지 한참동안 오지 않는 배를 기다리며 저 섬을 바라본다. 섬은 진하거나 엷게 겹겹이 멀어지고 형형의 구름은 가깝고 멀다. <18:30>
드디어 당도한 철부선을 타고 보길도로 향했다. 윤해남에게 전화했다. 그는 보길도에서 8년째 그림 그리며 산다. 저녁 7시가 넘어서야 보길도가 보이기 시작한다. 산등성에 걸린 구름의 가장자리가 주황빛으로 물들고 선착장의 실루엣이 보인다. <19:26> 선착장에 닿자 일행은 석양의 해안도로를 타고 공룡알 해변으로 내달렸다. 해운과 석양이 만나 투명한 원색으로 번진 하늘이 장관이다. 일몰의 장대한 풍경이 광휘를 뿜어낸다. 변화무쌍한 구름의 역동적인 율동은 어떤 춤사위도 능가한다. 지상의 수려한 풍경만큼이나 화려하다. 너른 바다의 수면에 미끄러져 욜량거리는 영롱한 빛깔에 탄성이 절로 난다. 육신의 깊은 곳에서부터 감동이 밀려온다. 황금 비단에 모래알처럼 반짝이는 수정이라서 그 황홀한 빛깔을 내겠는가. 그 수많은 일몰사진과 그림이 왜 제대로 감흥을 전하지 못하는가! 호기를 이만저만 부려본다. 공룡알 해변에는 이미 땅거미가 져 어둑어둑하다. 공룡의 알처럼 큼지막하고 반들반들한 갯돌이 해변에 가득하다. 사람들은 드러눕거나 비스듬히 앉아 먼 바다와 하늘을 본다. 저기 뾰족산 위에 초승달이 떴다. <20:08>
순식간에 모기에게 발목을 뜯기고 해변을 나오자 가게 옆 간이 탁자에 일행들이 모여 있다. 날렵하게 썰린 전복 위로 술잔이 넘나들기 시작하고 한사람의 목소리가 보옥리 마을에 찌렁찌렁하다. 그는 남도의 인상을 분명하게 각인시키려는 듯 억세게 사투리를 구사한다. 사진가 박일구가 구사하는 사투리 또한 구성지다. 두 사람이 리드미컬하게 주고받는 말이 살아있는 또 하나의 남도창이다. 지인인 듯한 주인장이 거나하게 취기가 오른 벌건 얼굴로 나타났다. 예정된 수순처럼 공짜안주에 술병이 불어나자 취흥은 겨드랑이를 타고 오른다. 예약된 저녁식사 때문에 아쉽게 자리를 파했다. 청별항으로 돌아오는 길에 선창리에서 윤해남을 만났다. 얼마 만인가. 푸짐한 저녁상이 차려진 식당에 일행들과 함께 마주앉은 윤해남은 연거푸 술을 비운다. 어눌한 말투는 여전한데 눈빛은 날카롭다. 왁자하게 한바탕 저녁을 물리고 사람들은 밤바다의 선창에 모여 앉아 술자리를 이어간다. 윤해남을 바래다주었다. 바다로 면해 있는 그의 집이 정갈하다. 그가 그린 그림들을 보았다. 그동안 그림을 많이 팔아먹었는데 지금은 여의치 않다고 특유의 억양으로 내뱉는다. 파도 그림과 나무그림들이 있었다. 세련된 구조와 색채가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다. 다시 오면 며칠이고 기약 없이 묵을 거라고 으름장을 놓고 헤어졌다. 자정을 넘겨 숙소로 돌아오는데 길가 평상에 일행들과 술병들이 아직도 모여 있다. 밤바다는 깊어 가고, 낯은 아직 설고.
2006.7.29 토요일
첫배가 드는 섬의 아침이다. 하늘에 구름이 가득하다. <09:11> 우리는 고산 윤선도가 말년에 풍류를 즐겼다는 세연정으로 이동했다. 고산은 이립에 즈음하여 함경도 경원에서 시작된 유배에서 74세의 고령에 삼수 유배를 떠나기까지 세 차례에 걸쳐 십수 년의 유배와 이배를 거듭한다. 보길도는 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영덕에 유배된 후 풀려나 초야에 묻히려고 제주도로 가던 중 우연히 들렀다가 수려한 경관에 반해 눌러앉은 곳이다. 이곳에서 그는 물길을 막아 큰 연못을 만들고 정자를 지어 무희들을 동원하고 노래를 즐겼다고 하니 그 만한 풍류를 이루려면 무엇보다 상당한 재력이 있어야겠다. 해남 윤씨의 대종을 이어받은 윤선도의 선조는 대대로 이 일대를 통틀어 부자였다고 한다. 세연정은 생각보다 규모가 크고 짜임새가 있었다. 30여 평 정자의 사방이 위아래로 닫는 나무창으로 되어있고 4평 남짓 방의 마루를 한자 정도 높였다. 사시사철을 고려하여 트이거나 닫히는 유연한 공간이 자연스레 연출된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한 폭의 그림이다. 유려하게 흐르는 세연정의 공기를 들이마시며 어렴풋이 떠오르는 그의 풍류를 되새김질해 본다. 옛 선조의 호방한 풍류에 쉽사리 주눅이 든다. 어쩌랴! 그의 호사가 부럽기만 한 것을. 기왕에 있던 큰 바위 옆에 작을 돌을 옮겨와 정교하게 배치한 연못의 스케일이 우주적이다. 거대한 바위와 연꽃이 어우러지는 연못의 정경을 목탄으로 담았는데 나중에 찾아보니 없다. 넋이 빠져 세연정 툇마루에 흘렸나 보다. <10:??> 난간에 앉아 바로 옆에 멋들어지게 휘어진 소나무의 자태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10:23>
일행들은 일정을 따라 동천석실을 향했다. 고산은 격자봉이 마주 보이는 산중턱에 한 칸 집을 지어 놓고 산중독서를 즐겼다. 두어 평 남짓의 정자는 소우주를 짓기에 꼭 알맞다. 신선이 따로 없겠다. 열어젖힌 문밖으로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연꽃잎처럼 봉우리들이 둘러쳐 있어 부용동이다. 바위에 기대어 격자봉을 바라본다. 구름의 그림자가 산등성이를 천천히 지나간다. <11:08> 일부러 짜 맞추어 놓은 듯한 큰 바위 사이로 도르레를 설치하여 산 아래 낙서재에서 요깃거리를 조달받았다고 한다. 서너 걸음이나 뗄 수 있을까. 쬐그만 마당이 탁 트인 시야로 인해 더없이 넓다. 바위의 결을 따라 소략하여 재빠르게 그리고 나서 보니 사람의 얼굴표정이 거기 있다. <11:32> 정자를 떠받치는 커다란 암벽에서 물이 나와 물웅덩이가 생겼다. 타락한 선녀와 몰래 멱 감기 딱 좋겠다. 산을 내려와 고산이 살았던 낙서재의 집터를 보았다. 부용동에서 가장 양지바른 곳이라 한다. 복원공사가 진행 중에 있다. ‘눈은 청산에 있고 귀는 거문고에 있으니, 세상에 무슨 일이 내 마음에 이르랴. 가슴속 가득 호연지기를 아는 이 없어 한 곡의 미친 노래를 홀로 읊노라.’ 낙서재에서 읊은 고산의 시다.
이 곳 지리에 밝은 박일구의 익숙한 운전솜씨에 한결 느긋해진 마음으로 해변의 전망 좋은 언덕에 올랐다. 예송리 몽돌해변이 한눈에 들어온다. 울창한 방풍림이 눈썹처럼 해변을 따라 펼쳐진다. 뭉게구름이 지날 때마다 바다에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운다. 당사도와 예작도가 자태를 뽐내며 어슷하게 빗겨있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고산 윤선도의 오감이 살갗에 와 닿는다. <12:09> <12:31> ‘옛부터 동방(東方)에는 어부사(漁父詞)가 있었으나 누가 지은 것인지 알 수 없는데, 집고시(集古詩)로서 곡조를 붙인 것이다. 이를 읊으면 시원한 강바람과 바다의 비가 어금니와 뺨 사이에서 이는 듯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표연(飄然)하게 하고, 유세지의(遺世之意)를 갖게 한다. 맑은 못이나 넓은 호수에서 조각배를 띄우고 즐길 때에 사람들로 하여금 목청을 같이하여 노래 부르게 하고 서로 노를 젓게 한다면 이 또한 하나의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어부사시사의 발문 중에서)
우리는 철부선을 타고 다시 완도로 나와 남도의 넉넉한 점심을 먹었다. 황명창이라 호칭하는 다부진 인상의 여류 소리꾼이 합류했다. 식사를 마치고 청산도 행 철부선을 타기 위해 여객선터미널로 이동했다. 주말이라 사람들로 붐빈다. 예정보다 두 시간 지체되었다. 철부선을 탈 때마다 진풍경이 연출된다. 네, 다섯 명의 사람들이 포진하여 뱃머리로부터 3/4가량의 넓은 공간에 빽빽하게 차를 채워 넣는다. 목마 타는 것처럼 차타고 배타는 재미가 있다. 저녁때가 되어 도청항에 닿았다. <18:13> 우리 일행을 태운 두 대의 차량은 당리 고개에 올랐다. 대대로 무당들이 많이 배출되어 지명이 당리다. 소나무 밭 한 가운데 당집이 있고 둔덕에 평평한 제단이 바다를 향해 있다. 황명창은 북을 들고 정좌를 한다. 잠시 목을 풀더니 본격적으로 소리를 시작한다. ‘늴리리야, 청사초롱 불 밝혀라.’ ‘아리아리랑 서리서리랑’ 살랑, 바람에 솔 냄새가 코끝에 싸하다. 자연 속에서 황명창의 소리가 실로 잘 어울린다. 탁배기 한잔이 항아리 크기로 눈앞에 어른거린다. 감흥을 주체 못하고 화첩을 되는대로 폈다. <18:29> <18:50> 유채꽃밭의 나지막한 돌담과 황톳길이 인상적이다. 영화 ‘서편제’에서 유봉일가가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내려오던 길이다. 5분 30초 동안 롱 테이크로 잡은 명장면으로 꼽힌다. 우리 일행은 북과 소리를 앞세워 줄줄이 그 길을 간다. 황연수와 조상열의 껄쭉한 선창이 매겨지고 흥겨운 후렴구가 합창으로 이어진다. 유근택은 북을 건네받자 독특한 발놀림과 몸동작으로 흥을 더한다. 고조되었던 흥이 가라앉자 노란 원색의 삼층집이 생뚱맞게 눈에 들어온다. 드라마 ‘봄의 왈츠’의 세트다. 가히 초현실적이다. 문득 작년 여름 사생여행을 마치고 오랜만에 돌아온 작업실에서 마주친 레몬이 떠오른다. 그 옆에 사과, 양파, 감자 따위는 썩어 문드러졌는데 수입된 과일 레몬은 샛노랗게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되돌아 나오는 길에 남성의 귀두를 쏙 빼닮은 반질반질한 바위를 보았다. 그 옆에 초분도 있다. 초분은 임시로 주검을 썩히는 무덤이다. "날송장이 선산으로 가는 것 봤는가. 불효중의 불효여, 육신이 문드러지고 이승에서 살다간 흔적일랑 모두 남겨놓고 곱게 뼈를 발라 땅속에 묻어야 썩은 물이 괴지 않어, 글고 뱃일하다가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어떻게 할거여. 상주도 없는 판에 마구 묻어버릴 수 없잖아." 맵시 있는 자태의 해송이 바다 쪽을 향해 초분을 감싸고 있다. <19:14> 언덕을 내려와 지리해변에 들렀다. 수령 200년이 넘은 아름드리 곰솔이 백사장을 따라 방풍림을 이루고 있다. <19:52> 해변에서 바라보는 다도해상의 일몰이 일품이라는데 해가 저물어 아쉬웠다. 선착장으로 돌아와 숙소를 정하고 여장을 풀었다. 밤바다의 바람을 맞으며 담소를 나눈다. 작은 쾌속정이 쏜살같이 다가오더니 머리에 붕대를 감은 어린 아이를 태우고 사라진다. 섬의 일상이 엿보인다. 된장국과 묵은지, 두껍게 썰은 회와 막걸리와 소주와 맥주를 반주로 저녁을 먹었다.
2006.7.30 일요일
5시 30분쯤 차를 몰아 청산도의 동쪽 끝 조그만 포구에 ‘해뜨는 마을’로 갔다. 천지가 훤해졌건만 운무가 자욱해 해가 보이지 않는다. 해안가 도로에 앉아 먹과 종이를 꺼냈다. 섬 자락 위에 붉은 태양이 안개에 싸여 빛을 발하고 작은 구름이 나풀거린다. 불그스레한 기운을 머금은 바다는 조용하다. <06:11> 안개 너머로 해가 솟아올랐다. 바다 표면이 하얗게 갈라진다. 혼비백산한 구름은 사방으로 흩어지며 태양의 출현을 알린다. <06:16> 태양은 세상을 호령하며 물길을 가른다. 구름이 뭉쳐 한 덩이가 되는가 싶더니 곧 부서져 동강난다. 눈부신 태양이 대기에 가득하다. <06:21> <06:45> 저만치 태양이 떠올라 비로소 사물이 분간된다. <06:50> 이글거리는 남도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06:57>
아침 일찍 완도로 가는 철부선을 탔다. 넘실대는 파도의 물결에 아침 해가 낮다. 배는 오르락내리락 파도를 내달리고 나는 철갑판에 기대어 눈부신 해와 흰 파도를 바라본다. <09:11> <08:52> 완도에 도착한 후 자동차로 신지도로 건너와 이광사가 유배 살았던 동네를 찾아 나섰다. 신지도의 아름다운 풍광에 넋을 잃고 있다가 당도한 곳이 금곡리 마을이다. 이광사가 묵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집 마당에 우리는 둘러앉아 인근에 사는 노신사의 설명을 들었다. 강화학파 원교 이광사는 조선 4대 명필로 나주 괘서 사건에 연루되어 오래도록 여기서 귀양살이를 하다 세상을 하직했다. 해남 대둔사에 원교가 쓴 현판을 귀양 가던 추사 김정희가 보고 초의선사에게 당장 떼라 일렀다가 9년 귀양을 살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보고 크게 뉘우쳤다는 일화가 있다. 추사는 귀양살이 끝에 문자향과 서권기가 그득한 골기로 세한도를 그리고 추사체를 완성했다. 노부부가 사는 오래된 집을 둘러보았다. 그을린 듯 새카맣게 절은 부엌의 문짝 안에 큰 솥이 걸린 아궁이와 나무로 만든 농기구가 세월을 거슬러 삶을 재현한다. 손으로 쌓은 돌담에 진노랑의 호박꽃이 지금, 여기에 눈부시다. 그 옆에 조롱박 꽃은 차라리 청초하다. 비탈진 마을의 골목길을 돌아 나오는데 멀리 짙푸른 바다가 보인다. 구름은 여전히 그 위에 왕성하다. <10:41> <10:56>
우리는 일정의 마지막으로 드라마 해신 장보고의 촬영지 소세포에 들렀다. 바다로 면한 음식점의 데크에 자리를 잡고 해물 라면과 칼국수를 먹었다. 장마 비로 촬영용 목선 두 척이 내려앉았다. 마치 팔다리가 비틀린 인조인간의 쓰레기더미를 보는 것 같다. 오목하게 패인 소세포구가 그래도 아름답다. <13:06> <13:08> 모자 그늘에 의존하여 재빠르게 그림을 그리고 돌아섰더니 방송 촬영팀이 기다리고 있다가 그 모자 벗어들고 뙤약볕 인터뷰에 응하라 한다. 기꺼이 나섰다. 황명창과 지인인 듯한 주인장이 막걸리와 안주를 내어 왔다. 주고받는 공술이 배부른데 부채살 펴는 소리와 함께 황연수 명창의 흥겨운 목이 바다를 향해 또다시 터져 나온다. ‘저기 가는 저 처녀 엎으러나 져라 일으켜 주는 듯 보듬어나 보자.’ ‘아리아리랑 서리서리랑 아라리가 났네.’ ‘서방님 올까봐 홀딱 벗고 잤더니 문풍지 찬바람에 설사병만 얻었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흥겹게 매기고 받는 진도 아리랑의 노랫말이 살갑다. 유근택과 박일우는 즉석에서 후렴구를 받아 경쾌한 율동을 짓는다. 차 트렁크에 북 대신 넣고 다녀도 되겠다고 수군댄다. 슬금슬금 주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그 진득한 노랫말이 대동문화 조상열의 목에서 흘러나왔다. 참나무에 구멍을 잘도 내는 딱따구리에 이내 서방을 비교하여 신세타령하는 대목에서 사람들의 표정이 일순 굳어지더니 아이의 손을 잡아끌고 재빠르게 사라진다. 그렇게 아담한 포구의 가짜 세트장에서 걸진 목청으로 진솔한 삶을 노래하고 사람들은 들썩거리는 육신을 어색해 한다. 야릇한 조화다.
일행을 태운 두 대의 차량은 광주를 향해 뻗은 포장도로를 달린다. 달리는 차안에서 그림 그리는 재미가 쏠쏠하다. 제절로 붓끝이 떨린다. 그림을 그릴 때마다 긴장된 떨림을 살갗에 유지하려고 그렇게 애쓰지 않았던가. 뒷자리에 화가 유근택과 윤남웅 또한 그리기에 열중이다. 빈 종이를 남겨 가면 어딘지 개운치가 않다며 겸연쩍어 한다. 운전석에서 사진가 박일구는 무슨 과거시험 보러 가는 것도 아니고, 먹 향기가 좁은 차안에 진동한다며 박장대소한다. 훤하게 뚫린 도로 위로 구름이 여전히 탐스럽다. 차에 앉아 배를 탈 때처럼 거대한 기차가 뿜어내는 연기를 보고 있는 건 아닐까. 유치한 상상에 입꼬리가 말린다. 저 멀리 무등산이 보인다. 육산의 넉넉함과 여유로움이 거기 있다. <15:50> <16:18> <16:32>
광주 신세계 갤러리에 모두 모였다. 전시할 장소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화가 윤남웅의 적극적인 제안으로 긴 여정의 회포를 광주 막걸리로 풀기 위해 일행들은 또 이동했다. 20여분이 지나 오래된 시장의 막걸리 집에 옹기종기 머리를 맞대고 모여 앉았다. 돼지머리편육과 막걸리가 나왔다. 우리는 호기롭게 ‘머리’부터 먹어보자며 잔을 부딪쳤다. 막걸리는 분바른 누이의 뺨처럼 뽀얗게 맑았다. 몇 순배가 돌고 농이 오간다. 술이 달다. 몇 방울의 코피가 묻어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졸음이 왈칵 쏟아졌다. 그리고 기억의 필름은 이튿날 하트형의 침대 위에 큰대자로 누운 모습에서 다시 연결되었다. 혼자였다. 냉수 한 사발을 들이 키고 여관 문을 나섰다. 몸에 술기운이 남아 중력으로부터 한결 자유롭다. 어제 눈여겨 두었던 그 골목길이다. 잠시 후 가게를 수리하느라 땀이 범벅인 된 윤남웅 부부와 작별하고 그 앞에 세워두었던 차를 몰고 나왔다. 광주에 사는 동생네 의류매장에 들렀다. 자고 가라는 빈말 아닌 권유에 파죽음이 된 몸을 쉬어가기로 했다. 그림을 한 장 주었다. 남도 여정의 중간 기착지로 삼아야겠다.
2006.8.1 화요일
아침에 느긋하게 일어났다. 오늘 출발하는 4차 답사팀에 합류할까 했으나 이번 여정에는 철부선이 운행되지 않는다 하여 포기했다. 손에 들고 다니기에 부담스러운 화구 일체를 차에 싣고 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동생 집을 나와 2순환도로에 올랐다. 맑은 하늘에 구름을 벗 삼아 보길도를 향해 달렸다. 남도의 풍광을 좀더 여유롭게 담아볼 요량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차는 진도를 향해 달리고 있다. 몸의 연장이 아니라 기계의 확장선상에 내가 있다. 진도대교를 넘어 왼편에 바다를 두고 해안을 따라 마냥 달렸다. 운림삼방과 국립남도국악원, 남도석성을 지나쳐 서쪽 끝 세방낙조에 이르렀다. 청산도의 일출과 보길도의 일몰을 잊지 못해 발걸음이 이리로 닿았나 보다. 길가에 차를 세우고 종이와 먹을 꺼냈다. 후끈 달은 아스팔트에 차바퀴가 녹아 붙겠다. 먼 바다를 내다본다. 깊고 푸른 바다가 호수같이 매끈하다. 짙은 녹색의 나무들과 수풀, 밭이랑과 뭉게구름이 용광로 같은 한여름의 햇살 속에서 피어오른다. <15:19> <16:11> <16:49>
전망대 옆 포장마차에서 팥빙수와 삶은 계란 5개를 먹은 다음 한 다발의 종이와 먹과 붓을 챙겨 나무 사이로 낙조를 볼 수 있는 풀밭에 자리를 잡았다. 천지에 붉은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자 어디선가 사람들이 삽시간에 모여 들었다. 하얗게 비치는 바다의 표면이 좁혀지면서 낙조를 드리우기 시작한다. 해가 수면에 가까워진다. 사방팔방으로 붉게 물드는가 싶더니 풍덩, 어느새 태양은 사라졌다. 파도는 태양의 흔적을 지우며 찰랑거린다. 사람들이 웅성거린다. ‘옴매야, 해 봐라, 참 이뿌다.’ ‘지는 해를 끝까지 배웅해야제.’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낙조가 제일이지.’ 네 번째 그림을 그릴 때 해가 급히 기울어 다섯 번 째 그림으로 옮겼다. 잔상으로 네 번째 그림과 마지막 그림을 덧그렸다. <18:55> <19:10> <19:17> <19:18> <19:26> <19:28> 한 아주머니가 옆에 쪼그리고 앉아 그림을 거저 달란다. 멀리 울산에서 왔다며 성화다. 쓱쓱 손쉽게 그리는 걸 보고 가벼이 말을 건네 본 걸까? 화구를 정리하고 벌렁 차에 몸을 눕혔더니 분 냄새가 코끝에 남아 고약하다.
내일 일출을 보아야겠는데 한창 피서의 철이라 숙소를 구하지 못해 어정쩡한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각각 10여 명씩 세 무리가 눈에 띈다. 척 보기에도 전통적인 5.5등신의 비례를 훌쩍 넘는 청춘 남녀가 둘러 앉아 놀이에 열중이다. 그 옆에 파란색 트럭을 타고 온 중년의 무리를 보자. 완벽한 시스템을 갖춘 먹거리와 더불어 춤과 노래가 절정 고수의 그것에 가깝다. 덩실덩실 어깨춤이 흥겹다. 메들리 뽕짝의 리듬은 처음과 끝이 없다. 언제 시작했는지, 언제 끝날지 도무지 알 수 없다. 항상성이 그 가락 안에 있다. 세 번째 무리는 동네 사람들이다. 멍석을 펴 놓고 포장마차에서 팔고 남은 걸 먹고 마시며 윷놀이를 한다. 전망대의 난간에 기대선 채 이들을 외면하고 있는데, 그 때 사위가 어둑한 밤바다에 비껴 누운 달이 두둥실 소리 없이 떠올랐다. 달빛은 잔주름살 파도의 물결마다 내려앉아 조요하다. 화첩을 폈다. <22:37>
2006.8.2 수요일
깜박 잠이 들었다. 깨어나 보니 자정이 가깝다. 사람들은 온데간데없고 가로등불 아래 덩그러니 홀로 남았다. 차를 몰아 진도 읍으로 들어갔다. 피서 철답게 불야성이다. 인스턴트 비빔밥으로 요기를 하고 근처를 뒤져보았으나 잠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깜깜한 진도의 밤을 헤매다 새벽 3시가 다 되어 가계 해변에 차를 세웠다. 뒷좌석에 대충 구겨져 잠을 청했지만 쉽지 않다. 더 이상 버티기가 어려울 때까지 잠은 미루어졌다. 주변이 훤해져 몸을 일으켰을 때 5시가 훨씬 넘었다. 날이 샜다. 운무에 가려 보이지 않는 태양은 바다를 비추는 대신 붉음과 푸름 사이에 걸쳐 보랏빛으로 물들였다. 버석버석 해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해변을 거닐었다. 무언가 반짝 빛난다. 수평선 너머 병풍 같은 구름 위로 동그란 태양이 고개를 내밀었다. 냅다 차로 뛰어 종이와 필통을 가져왔다. 파도가 넘실거리는 백사장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태양이 토해내는 빛 덩어리는 용광로 쇠 녹이듯 바다를 가른다. 잔잔한 파도 위에 홍조 띤 태양은 어느새 몇 곱절로 늘어 나 바다의 표면을 가른다. 헤집어 놓은 바다의 속살이 새하얗다. 태양만큼이나 작은 나는 이편에서 흥건하게 고인 태양을 바라본다. <06:41> <06:39> <06:28> <06:21> <06:09> <05:59> <07:19> 멀리서 한 아이가 점점이 다가오더니 경사진 백사장 모래 위에 쪼그리고 앉는다. 여섯 살쯤 되었을까. 대꾸할 겨를도 없지만 그 아이도 가타부타 말이 없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네 장의 작은 그림과 중간크기의 그림 두 장과 한 장의 큰 그림을 그리는 동안 그 아이는 꼼짝 않고 지켜본다. 한 숨을 돌리고, 저쪽에서 물놀이하는 아이들을 가리키며 말을 건넸다. ‘바닷물이 얕은가봐?’ ‘난 물에 안 들어가요!’ 아이는 손사래를 치며 주춤주춤 돌아선다. 태양은 온 세상을 밝힌 후 하나의 사물로 돌아와 피부에 따끔거린다. 쏟아지는 햇살을 피해 차에 올라타고 쏜살같이 달려 단숨에 진도대교를 건넜다.
아침대신 2리터짜리 식혜 한통을 사들고 서해안 고속도로에 올랐다. 점심나절 선운사를 들러 볼 요량으로 톨게이트를 빠져나왔다. 초입의 계곡에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차를 돌렸다. 동호 해수욕장 방향으로 달렸다. 오른 편으로 불그스름한 갯벌이 아름답다. 다시 돌아 나오는 길에 펼쳐지는 두 개의 풍광이 눈에 익숙하다. 왼편으로 너른 들판의 파란 곡식 위에 하얀 뭉게구름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12:59> 오른편으로 완만한 초지가 매끈하고 계곡에 나무가 무성한데 잔잔한 호수 위로 산 아래 마을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흔히 볼 수 있는 배산임수의 단출한 지형이 무슨 공식처럼 펼쳐져 있다. <13:33> <13:21> <13:42> 다시 고속도로에 올라 얼마동안을 달리다 졸린 눈을 잠시 붙이려고 갓길에 차를 세웠다. 무심코 올려다보았다. 구릉의 파란 초지와 밭에 벌건 흙과 하늘 가득 뭉게구름이 글자그대로 뭉실거린다. 어릴 적에 새 국어교과서에서 본 여름 풍경이 떠오른다. 마르지 않은 잉크냄새와 더불어 기억에 또렷하다. <14:39>
찌뿌드드한 몸에 막무가내로 감기는 눈과 실랑이를 벌이며 서해안고속도로를 기듯이 달렸다. 집에 도착하자 긴장이 한꺼번에 풀린다. 긴 의자에 엎어진 채 그려 온 그림들을 실눈으로 쳐다본다. 기억을 퍼 올려보자. 가까운 기억에서부터 먼 기억으로 나아가면 어떨까. 먼 기억일수록 추억이 되어 풍요로움을 더해 주지 않던가. 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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