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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7.15(토) 철암일기(구와우) 4
2006.7.15 08:47 절골 the valley og jeolgoal, 종이에 콘테 conte on paper, 23x31cm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3층 30여 객실의 숙소는 절골 초입의 농가와 밭들로 둘러싸여 있다. 도려내고 들어앉아 있다. 언덕에 허름한 집이 있고 밭에 작물이 파랗다. 집 뒤에 나무숲이 헝클어져 있고. 빗속에 전신줄이 전신주를 세운다. <08:47>
2006.7.15 15:53 구와우, 비 It's raining, 한지에 먹 ink on korean paper, 63.5x93.5cm
컨테이너 작업실을 ㄱ자로 연결하여 생긴 작은 마당에서 바깥쪽을 향해 한지를 폈다. 붓과 먹통을 꺼냈다. 크게 호흡을 하고 비를 쳐다본다. 안개가 내려앉은 언덕 위에 아름드리 느티나무의 과장된 몸짓과 잘라낸 가지에 붙은 이파리가 비에 초라하다. 나머지 사물은 진하거나 옅거나 모두 비에 잠겼다. <15:53>
마음이 불안정하다. 오늘 박영률과 배정두가 차로 오고 송성재와 정신영과 또 한 사람이 다른 차로 온다. 활짝 핀 해바라기를 예상하고 온다. 비도 오고 꽃이 피지 않아 20일로 축제 개막일을 연기했다 한다. 안개가 자욱한 구와우가 그런대로 볼 만하지 않겠느냐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석파정 주인장 김준섭이 식구들과 함께 온다. 기차타고 권준성이 온다. 그들과 몇 번 연락을 주고받았더니 휴대전화가 뜨끈뜨끈하다. 철암그리기 정기 일정에 맞춰 중위 권우열이 온다.
2006.7.15 16:29 구와우, 비 It's raining, 종이에 목탄과 콘테 conte &charcoal on paper, 79.1x109.5cm
컨테이너의 한 방에 허윤희와 이정은과 최혜영이 그림을 그리고 다른 방에 정은화와 배석빈과 이혜인이 그림을 그리고 있다. 다른 방의 전면 유리창으로 비 오는 앞산이 보인다. 조용히 그려야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면서 창가에 비집고 화판을 세웠다.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비가 두드리는 나무들의 모습이 제각각이다. 매 순간 작고 큰 떨림으로 튄다. 나무를 구별할 수 있다면 좋겠다. 산등성에 물안개가 피워 오른다. 짧은 풀의 파란 초지가 매끄럽다. 산 아래 줄지은 큰나무 잎들이 비에 더욱 활기차다. 우당탕 개울물 흐르는 요란한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몸을 뉜 해바라기 가운데 꽃을 틔운 놈도 있다. 샛노랗게 또렷하다. 엉켜 붙은 소나무의 실루엣이 또한 뚜렷하다. <16:29>
둘러보니 붓꽃이며 동자꽃을 꺾어다 놓고 가까이 들여다보는 정은화와 등판이 다 들어날 정도로 허리를 굽혀 세필로 뭔가를 열심히 그리는 혜인이가 왼편으로 있고 오른 편에 배석빈이 싱크대에 화판을 세우고 그렇게 많은 색을 바삐 다루고 있다.
2006.7.15 16:48 구와우에 비 It's raining, 한지에 먹 ink on korean paper, 63.5x93.5cm
마당으로 나왔다. 붓을 들었다. 재작년인가? 옮게 심은 아름드리 느티나무의 시커먼 모습이 빗속에 장대하다. 사이에 이동식 화장실 벽이 스크린처럼 하얗다. 빗줄기가 주변을 탈색시킨다. 진한 먹이 아쉽다. 먹의 깊이가 비로소 보인다. <16:48>
「아하, 지금 생각난다! 어제 아침에 허윤희와 절골 숙소에서 구와우 까지 걸었다. 한시간 남짓 걸렸다. 독일에서 수학하던 중 졸업을 앞두고 산만한 정신을 다스리기 위해 요가를 시작했다는 그녀는 묵언수행도 했다. 요가는 호흡이 중요하다. 안과 밖을 넘나드는 공기의 호흡은 자연의 일부로서 숨쉬는 사물의 일차적인 수단이다. 여럿이 원을 그리며 말없이 걷는 묵언수행에서 무념무상의 순간 앞사람의 발뒤꿈치 주름이 크게 보일 때, 비로소 발 밟을 염려를 놓게 되고 일사불란하게 사람들은 방안을 돈다. 대상과의 거리가 사라지면 주객의 관계도 없다. 사물과 사물이 존재한다. 유년시절 태양을 뚫어져라 바라본 적이 있다. 동그란 원이 이글이글 움직인다. 양지바른 곳에 앉아 가끔씩 태양을 그렇게 바라보았다. 나와 태양과의 거리가 붙어버리는 모종의 일체감이다. 인간이 날 때부터 죽음을 향해 존재하는 것처럼 원초적 사물성을 지향한다. 생각하는 사람을 포기하고 그저 한갓 무심한 사물로서 존재하기를 원한다. 사람들은 흔히 객관적 거리를 두고 생각하기보다 자발적으로 군중심리에 휩쓸리면서 곧잘 사물의 상태로 남기를 원하지 않던가. 목요일 밤 구와우 하늘에 핀 북도칠성은 밝고 컸다. 사람들은 별 보러 구와우 언덕을 올랐다. 완만한 동산 아래 간이무대로 만들어 놓은 평상에 드러누워 별을 보면 하늘이 이불처럼 내려앉겠다. 그 해 겨울 백두산에서 돌아오는 길에, 백자작나무가 도열한 길에, 달리는 봉고차에서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겨울바람을 맞으며 별을 보았다. 그야말로 별 밭이었다. 그렇게 빼곡히 들어 찬 별을 첨 본다. 옆에서 말한다. 그 때 새벽에 출발해서 밤에 돌아왔기 때문에 별을 볼 시간대가 없었다고. 과연 그럴까. 또 다른 사람에게 그 별을 보았냐고 묻는다. 물음은 두가지로 들린다. 별을 보았느냐 보지 않았느냐? 그 아름다운 별을 너도 보았느냐?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누구의 기억이 사실인지 하등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서로 다른 층위에서 다른 형식의 말투를 구사할 뿐이다. 하나의 별이 또 다른 별을 찾아다니거나, 그 별이 거기 있거나 없어진다. 두 가닥의 꼬인 선처럼 감각은 사물성을 노래하고 개념은 사물의 존재를 결정한다. 수세미에 박힌 핀은 평면 위에 점이고 입방체에서 선이다. 개념은 평면의 논리를 타고 점에서 선으로, 선에서 면으로, 면에서 입체에 도달하지만 감각은 둘러싸인 공간에서 호흡을 타고 사물의 사물성을 옮긴다. 사물을 마주하여 스스로 사물이 될 때 순수 감각이 발동한다.」
전시 개막을 몇 시간 앞두고 참여 작가들은 작업에 박차를 가한다. 오기로 한 사람들이 속속 도착한다. 김정락의 제안으로 저녁식사 후로 작품배열을 연기하고 식당에 모두 모였다. 입맛을 돋울 요량으로 사기그릇에 담겨 나온 야생화와 야생초가 한 눈에 그림이다. 소스와 어울려진 맛과 향기가 허리를 곧추 세우게 한다. 조리팀장이 손님들을 대접하기 위해 산에 올라 즉석 채취한 것들로 만든 거라 한다. 과연. 뒤이어 산야초 비빔밥과 파전과 당귀막걸리가 나왔다. 스피커에서 구와우의 유일한 샹송이 흘러나온다. 그런데 흥을 몰아가기에 어딘지 2%가 부족하다.
작품배열은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이윽고 마치자 이번에도 조리팀장의 심심한 배려로 삶은 돼지고기와 수박과 야채, 막걸리와 소주가 전시장 바닥에 마련되었다. 족히 5미터는 되어 보이는 반투명한 ㅅ 지붕아래 마사토가 바닥에 깔려있고, 전시장 안으로 날아 들어온 해바라기 씨가 꽃을 피우고 무리 지워 서있고, 사람들은 멍석을 깔고 ‘자라나는’ 그림과 팻말 앞에 둥그렇게 모여 있다. 각자의 소개가 길게 이어지는 동안 술잔이 돈다. 저마다 혈색이 좋아진다. 막걸리에 소주를 타 마신다. 사람들은 맨발로 돌아다니며 사진도 찍고 고함도 지르고. 무지 산만하다. 당사자들에겐 자유로움이다. 이윽고 친구들이 먼저 일어났다. 얼마 후 나머지 작가들과 일행을 태우고 숙소로 돌아왔다. 긴장감이 풀린다. 씻고 잤다. 륮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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