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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7.13(목) 철암일기(구와우) 2
2006.7.13 08:15 절골 valley of jeolgoal, 종이에 콘테 conte on paper, 23x31cm
기억을 떠올리는 것도 꽤 피곤한 일이다. 그림을 보고 연상하자. 뇌에 무리한 활동을 요구하지 말자. 가뜩이나 뇌는 쉬는 적이 없질 않나. 명상의 핵심은 뇌를 쉬게 하는 거다. 무념무상의 경지가 곧 죽음의 고요함이다.
아침에 일어나 숙소 건너에 보이는 풍광이다. 어슬어슬 비를 뿌린다. 옥수수와 깨, 고추 따위가 밭에 심겨져 있다. 죽은 소나무 가지가 선명하게 몇 그루 서 있다. 그러고 보니 빈 집일지도 모르겠다. 길가에 몇 채의 집이 보이고 숲과 산이 둘러진다. 태백에서 어딜 보나 먼데 산이 있다. 아직 잠자리를 털지 못한 일행을 기다리며 차 안에서 조그만 스케치 북을 펴고 느리게 콘테를 움직였다. 느린 시간을 썼다.<0815>
2006.7.13 08:37 절골 현지동 hyungi-dong, 종이에 목탄 charcoal on paper, 42x59.4cm
몸에 열이 가해졌다. 갑갑하다. 조금 큰 스케치북을 꺼내 비 뿌리는 길바닥에 폈다. 바람이 거세졌다. 건장한 옥수수 잎이 흔들리고 죽은 소나무의 가지가 흔들린다. 사뭇 대조적이다. 하늘에 구름이 가득하다. 비 그치면 고추잠자리가 떼 지어 맴도는 유년시절의 그 하늘이다. <08:37> 종이가 뜯겨져 바람에 저만큼 날라 간다. 허둥지둥 이른 아침에 혼자 쇼를 하는데 그제야 일행이 숙소 문을 열고 하나둘 나타난다.
2006.7.13 09:34 절골에서 in the valley of jeolgoal, 종이에 콘테 conte on paper, 23x31cm
황태 해장국을 아침으로 거나하게 때우고 모퉁이에 차로 돌아와 숨을 골랐다. 옆을 보니 2002년 1월, 그 겨울 돌구지에서 지낼 무렵 무쇠로 된 장작난로를 만들었던 대장간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온갖 잡동사니로 토굴 같다. 늙수그레한 모습으로 아저씨가 조그만 나무의자를 내 놓고 앉아있다. 정겹다. 반갑다. 종이를 꺼냈다. 천천히 느린 시간을 움직여 앞을 내다보았다. 교회의 창문에서 지붕으로, 지붕 끝에서 구와우, 검룡소 방향으로 몇 겹의 산등성이 굽이쳐 돌아간다. 비가 잠시 그친 하늘에 구름이 피워 오른다. <09:34> 근경의 능선을 타고 내려 올 때쯤 포만감에 젖은 일행이 나타나 차 안의 고요한 수면에 작은 돌멩이가 던져졌다.
2006.7.13 11:55 구와우 guwhawoo, 종이에 목탄 charcoal on paper, 23x31cm
구와우로 오자 사람들은 어디론가 제각기 흩어졌다. 나는 맑은 날 동해가 보이는 구와우의 절개지까지 차로 올랐다. 바람이 극심하다. 천창을 열고 의자를 뒤로 한껏 젖혀 드러누웠다. 사각의 하늘이 영화장면처럼 돌아간다. 한참을 있다가 잠들기 직전에 스케치북을 찾았다. 구름 덩어리들이 어디론가 떼로 몰려간다. <11:55>
2006.7.13 12:52 구와우 guwhawoo, 종이에 콘테 conte on paper, 36x51cm
세목의 다른 종이를 꺼냈다. 각종 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이 박람회장 같다. 한 가지 모습을 고집하지 않고 유연하게 모양을 바꾸는 구름들의 전시장이다. 사이사이로 파란 하늘이 뻥 뚫려있다. 따뜻한 햇볕에 바람의 소리가 요란하다. <12:52>
2006.7.13 15:44 구와우 guwhawoo, 종이에 콘테 conte on paper, 23x31cm
사람들은 컨테이너 사무실 옆 나무 아래 모여 중국음식을 시켜 먹었다. 맑은 공기와 더불어 먹는 짬뽕 맛이 일품이다. 배불리 먹고 그늘에 누워 살포시 잠들다 말고 눈을 떠 보이는 대로 그림을 그렸다. 머리 위에서 나뭇가지가 힘차게 뻗어나고 멀리 능선의 초지 위에 구름이 뭉쳐 요상한 기운이 감돈다. <15:44>
김정락과 허윤희가 도착했다. 배석빈과 몇몇은 화판을 만드느라 합판을 옮겨와 톱으로 자른다. 톱질하는 배석빈의 연두색 장화가 썩 잘 어울린다. 이경희와 정은화가 자동차로 오는 중이다.
2006.7.13 16:52 구와우 guwhawoo, 종이에 목탄 charcoal on paper, 36x51cm
이 쪽 편을 바라보았다. 곱슬버들이라 하던가? 탱탱한 라면발처럼 유난히 가지가 꼬불거린다. 그 옆에 옮겨 심은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파란 이파리를 달기 시작한다. 내, 후년쯤이면 무성해지겠다. 작업실로 쓰는 컨테이너 일부가 보이고 나무숲이 현란하다. 가운에 좁은 틈으로 구와우 마을의 지붕이 희끗 보인다. 그 뒤로 넉넉한 산등성이 있고 그 위에 구름이 또한 여유롭게 덮여있다.<16:52>
몸을 일으켰다. 작은 종이에 게으른 몸으로 끌쩍대던 게 무안했나 보다. 큰 종이를 폈다. 산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커다란 잎갈나무가 바람에 뉘었다. 바람은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어가며 나뭇가지에 휘날린다. 작은 이파리들이 바람과 빛에 반짝거린다. 돌을 쌓아 물길을 만들고 수초도 심어 놓은 시내에 물이 불어 기운차게 흐른다. 다져 쌓은 돌무더기가 잘 가꾼 정원을 연상케 한다. 물가에 주황색의 동자꽃이 활짝 피어 눈에 박힌다. 오래된 숲에서처럼 죽은 나무와 산 나무가 바람에 버틴다. 상등성이 위로 상아 이빨처럼 구름이 새하얗다. 그 위로 진한 먹구름이 차례로 바람에 요동치며 범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다. <20:14>
2006.7.13 20:14 구와우 guwhawoo, 종이에 칼라압축목탄과 파스텔 pastel & color compressed charcoal, 101.6x64.8cm
그림을 그리는 동안 평상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경희와 장성화가 철암에 작품을 내려 놓고 건너왔고 이성경과 후원회장, 유광운 가족이 동해를 거쳐 왔다. 포도주를 비롯해 횟감과 김치와 밥 따위의 푸짐한 먹을거리가 금새 가득하다. 어둠이 몰려드는 선선한 저녁나절에 유쾌한 잡담을 즐겼다. 오늘도 이성경 소장이 꺼낸 화제를 시작으로 이야기는 빨간 술과 더불어 번져갔다. ‘자고로 예술은 꼴려야 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숙소로 이동했다. 김정락이 준비한 애니메이션 몇 편을 보았다. 이차원과 삼차원을 교묘히 넘나드는 선 드로잉이 매혹적이다. 이혜인이 구워 온 짐 캐리 주연의 영화 eternal sunshine..spotless..을 보았다. 나는 끝가지 본 사람 가운데 하나다. 사랑하는 연인이 갈등이 심해져 각자 상대에 대한 기억을 지우기로 맘먹고 회사에 의뢰한다. 뒤늦게 후회하고 기억 속에서 둘은 도망치지만 ooo에서 만나자는 말을 끝으로 기억을 상실한다. 회사의 직원이 밤새 작업한 다음날 그는 말끔하게 지워진 기억으로 집을 나선다. 전철 앞에서 갑자기 뭔가에 이끌려 반대편 기차를 타고 그 곳 ooo으로 간다. 열차 안에서 둘은 기억이 지워진 채로 다시 만난다. 서로의 관계를 발전시켜 가던 중 기억을 지운 사실을 여직원으로부터 통보받는다. 싸운다. 다시 화해한다. 우린 어쩔 수 없나 보다. 대충 이런 내용이다. 짐 캐리 특유의 코믹한 오버연기가 중간에 흐름을 방해하기도 하지만 수작이다. 타이타닉에 나왔던 여배우의 화려한 이목구비와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륮.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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