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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그리는 그 순간에는 대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기억에 의존하기 마련이다. 이는 또다시 그림을 그리는 더 짧은 그 순간에는 그리는 물리적인 행위와 감각만이 작동하기 때문에 모종의 개념적인 기억이 실제로는 개입하지 못한다는 말로 대체된다. 맹목적인 감각주의는 사실 조형의 체계를 갖춘 기존의 개념적 시스템을 소비하는 거다. 감각이 개념적 해석을 가능케 하지만 그것의 수단은 아니다. 감각과 개념은 불연속적으로 작동한다. 감각이 개념의 귀납적 수단이 아닌 것처럼 개념 또한 감각의 연역적 수단이 아니다. 감각은 감각을 부르고 개념은 또 다른 개념을 부를 뿐이다. 그림이 생각보다 빠르다는 리히터의 말처럼 그림은 그냥 그렇게 그려지는 것이다. 개념은 뒤이어 비평적 거리를 지니며 동원된다. 순수 감각에 의존하여 시간과 공간 속에서 형성되는 물질의 과정은 일루전의 형상성에 앞선다. 개념은 그림의 전후에서 작동한다. 최초에 하나의 개념이 있어 감각이 비로소 일어나는가? 아니다. 최초에 감각이 있다. 감각은 또 다른 감각으로 이어진다. 개념은 그 사이사이에 두 가닥의 선처럼 불연속적으로 꼬여있다. 그림은 조작이 아니다. 인위적인 조작은 그림의 밖에서 이루어지며 세상에서 그림이 존재하는 방식에 관여할 따름이다. 마찬가지로 나의 의식은 그림을 그리기 직전까지 나를 이끌고 그림이 끝난 후에 그림을 바라보게 한다. 장시간 이야기했다. 말의 형식을 말하기가 더 유효할 때가 있다. 내용은 이미 형식 속에 있기 때문이다. 누구든 자신의 말투를 강요한다. 말투 그것 자체가 권력이기 때문이다. 생각의 차이 보다 말투의 차이를 확인할 때 이해가 쉽다. 륮.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