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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2006.6.18 09:30 대현리 진바위산 jinbau mountain in deahyunli, 종이에 파스텔 pastel on paper, 42x59.4cm
2006.6.18(일) 철암일기 6
일치감치 일어나 한바퀴 둘러보고 다시 잠을 청했더니 벌써 날이 훤하다. 팬션 앞마당에서 진바위산을 바라보았다. 반대편에 달이 떠오르는 달바위산과 짝지어 진바위산이라 한다. 맑은 하늘에 하얀 뭉게구름이 휘황찬란하다. 뽀송뽀송한 아침의 대기에 비치는 사물이 사방에 화려하다. <09:30> 드문 시간대의 그림에 서명을 하고 철암으로 이동했다.
이경희의 경유차는 이른 아침에 이강우를 철암에 데려다 주었다. 신토불이에서 늦은 아침을 먹은 후 어느 새 나타난 철초 22기 김동언의 안내로 철암 북동에 남은 일본식 사택을 방문하기로 했다. 길을 잘못 든 금광골 개울가에 사람들은 첨벙 발을 담그고 나는 물끄러미 본다. 철암 중, 고등학교로 가는 길에 진폐 요양소를 짓고 있는 언덕의 길목에 그 집이 있다. 동문회장 댁이다. 암반위에 덩그러니 지어진 일본식 집이 60여년 되었다. 앞마당에 밭이 일구어져 있다. 정겨운 풍경이다. 마루바닥의 깔끔한 내부 화장실과 뒷마당으로 연결된 부엌을 둘러보았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정릉 꼭대기의 친구의 집이 생각난다. 간단한 일자형의 단층집에 300 평가량의 너른 마당 가득 배추나비가 너울거렸다. 아마도 지금은 연립주택이 그 마당에 빼곡히 들어섰을 거다. 세월을 묵혀 기억을 보존할 수 있는 공간이 왜 사라져만 갈까. 기억의 무분별한 훼손이 미치는 영향력이 현재의 삶에 위협적인 데도 손에 잡히지 않는 정신적인 고통이라 그런가.
구와우로 이동했다. 어제 새로 지은 원두막에 올라 탁 트인 전경을 바라보았다. 고랭지 채소 재배지로 국내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매봉산이다. 높은 정상에서부터 우람한 능선을 늘어뜨리며 정면의 시선을 품는다. 소의 잔등이 같은 산등성의 초록이 화사하다. 맑은 하늘에 구름과 매끈한 초지에 양털처럼 군집한 나무들이 모여 한 장의 달력을 만든다. 눈앞에 보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울 지경이다. 충분한 시간은 아니었지만 작은 종이와 큰 종이에 연달아 정경을 담았다. <13:58>, <14:50> 원두막에 드러누워 자다가 먼 산에 눈길 한번 주고 몸을 뒤집어 또 자고, 간간이 막걸리와 과일을 마시고 씹으며 별로 한 일도 없이 한여름을 다 보내고 나면 얼마나 개운할까. 잠깐의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그림 2) 2006.6.18 13:58 구와우 guwow, 종이에 파스텔과 칼라압축목탄 pastel & color compressed charcoal on paper, 42x59.4cm
그림 3) 2006.6.18 14:50 구와우 guwow, 종이에 파스텔과 칼라압축목탄 pastel & color compressed charcoal on paper, 64.8x101.6cm
오후 3시에 구와우를 출발하여 아담한 통리역에 들러 전사? 이강우를 태우고 동해를 향해 달렸다. 오늘은 선두가 김동현의 봉고차에서 김동언의 트럭으로 바뀌었다. 나는 원생에게 운전을 맡기고 고원의 풍경을 즐기며 눈을 달래기로 했다. 연주곡 habana sunset 이 흥겹다. Lou Reed의 ‘Perfect day,’ ‘walk on the wild side’가 잘 어울린다. 앞서 가는 여자 경유차에서 흘러나오는 주현미의 꺾어지는 목청이 또한 일품이다. 말짱한 하늘에 소나기 물벼락이 풍선 같은 기분을 더욱 팽창시킨다. 이 길이 남불의 지중해 연안을 향해 있어도 괜찮겠다.
동해의 김동언의 집으로 가는 길이다. 추암 해변에서 바다를 보았다.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일출의 배경이 여기다. 그 장면이 기억 속에 너무 선명해서인지 눈앞의 기암이 오히려 시시하다. 근녕에 공황에 설치된 조경작품의 진짜 꽃을 보고 쫌 잘 만들지’라고 말했다가 무안했던 적이 있다. 진짜와 가짜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소리를 그 때 내안에서 들었다. 일행들은 물을 보자 곧 바닷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투적인 놀이를 했다. 단순한 놀이에 한껏 즐겁다. 동심이 동한다.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며 ‘물이 참 많죠?’ 라고 묻고, ‘가득 찼는데.’ 라고 대답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리 많지 않겠다. 백사장을 나오는데 모래에 뿌리를 내린 갯 메꽃이 눈에 들어온다. 누이의 저고리 색을 닮았다는 메꽃의 빛깔이 한동안 잔상으로 남았다.
묵호항에서 장을 보았다. 횟감을 팔고, 썰어주고, 먹을 자리를 제공하는 협업이 잘 되어있다. 막 잡은 횟감을 싸게 맛볼 수 있는 시스템이다. 기다리는 시간이 꽤 길다. 사진기를 들고 둘러보았다. 일행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사진 속에 담긴 장터 속에서 일행들은 또 한사람의 등장인물이다. 차에 다시 돌아와 묵호의 해질녘을 펜으로 드로잉 했다. <18:32>
그림 4) 2006.6.18 18:32 묵호항 mukho harbor, 종이에 펜, pen & ink on the paper, 10.2x15.2cm
먹을 것을 잔뜩 싸들고 이윽고 당도한 김동언의 집은 담장이 없었다. 마당에는 온갖 약초와 야채가 깊은 숲 속에서 중대한 회의라도 하듯 올망졸망 모여 있다. 방금 따다가 갓 씻어낸 풀잎에 방금 썰어낸 횟감을 싸서 한 입 베어 물자 아삭, 소리도 경쾌하다. 복분자술의 진한 맛은 몸 깊숙한 곳에 흐르는 나약한 혈관을 일으키며 단 번에 차가운 피를 구석대기로 밀쳐낸다. 직접 담갔다는 젓갈 맛이 예사롭지 않다. 하나같이 오래 동안 삭힌 깊은 맛이거나 갓 나온 싱싱한 맛이다. 부인은 안정된 자세로 귀한 손님이라며 성큼성큼 큰 손으로 대접한다. 모두들 대단한 집중력을 발휘했다. 언제든 또 오라는 말을 뒤로 하고 고속버스 시간에 맞추어 아쉽게 발걸음을 뗐다. 귓전에 맴도는 또 오라는 말이 아무리 생각해도 빈말 같지 않다. 일행들은 동해시의 한적한 고속 터미널의 어두운 마당 한가운데서 작별을 고했다. 다시 홀로 남은 나는 풀어졌던 마음을 다잡고 밤길을 달려 태백으로 향했다. 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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